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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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은행… 폐점 예정지 주민 ‘집단 반발’

디지털화 속도·비대면 확대 영향
6년 새 점포 수 15%나 줄어들어
노년층 모바일뱅킹 어려워 막막
다른 지점도 멀어 이동불편 호소
전문가 “공동지점 운영 등 고려를”

“여기 은행이 없어지면 돈 필요할 때 저 멀리까지 가야 하는데…. 나는 다리가 아파서 힘들어. 나이 먹은 사람들은 가기가 어려워요.”

지난달 30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A아파트단지 내 체육관. 아파트 주민 김태하(81)씨가 “은행이 없어지면 막막하다”고 말하자 자리에 모인 20여명의 주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었다. 이날 이들이 모인 이유는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유일한 은행이 곧 없어지기 때문이다. 김씨가 “아파트에 5000세대 넘게 사는데 은행이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은행 점포를 없애는 건 노인을 무시하는 정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주민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주민들은 은행 폐점 반대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국회의원 면담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금융 서비스의 디지털화 속도가 빨라지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비대면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은행 점포 수가 계속 줄고 있다. 모바일뱅킹 등에 익숙한 젊은층은 점포가 감소해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지만, 기계 사용과 비대면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은 은행 업무를 보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5년 말 7281개였던 은행 점포 수는 올 상반기 기준 6326개로 줄었다. 올해 말까지 약 150곳이 더 문을 닫아 점포 수는 6183개까지 감소할 예정이다. 6년 전과 비교하면 1098개(15.1%)의 점포가 사라지는 것이다.

줄어드는 은행 점포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고령자 등 디지털 취약계층이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의 ‘디지털정보 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고령층의 온라인 금융거래 서비스 이용률은 일반 국민의 41.1%에 불과하다. 모바일뱅킹이 활성화됐지만, 많은 노인은 여전히 입출금 등 금융거래를 하기 위해 은행 점포를 찾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은행이 없어지는 지역의 주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는 등 반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A아파트의 경우 아파트 안에는 신한은행만 있고, 아파트 근처에 KB국민은행이 있지만 신한은행은 내년 2월에, KB국민은행은 이달 말에 문을 닫는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은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지금보다 2㎞가량을 더 걸어가야 한다.

아파트 주민 B씨(70대)는 “현금을 주로 써서 거의 매일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간다”며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사용은 익숙지 않은데 직원도 없어서 혼자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은행이 사라진다니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주민 최모(69)씨도 “아파트 주민의 3분의 2는 노인인데 은행 폐점을 찬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며 “다른 지점은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없어서 가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밖에 경기 고양 일산동구 풍동에서도 내년 1월 KB국민은행 폐점이 예정돼 주민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지역 국회의원과 면담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금융당국과 은행권은 점포 축소로 인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점포 폐쇄 결정 전 영향평가를 시행하고 ATM 등 대체수단을 제공하고 있지만 노인층의 불편은 해결할 수 없는 등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달 발표한 ‘은행권의 점포 축소와 금융소외계층 보호를 위한 과제’ 보고서에서 “점포 축소에 따른 금융 소외현상을 방치할 경우 일부 이용자들이 금융 서비스에서 탈락해 사회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정책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관련 보고서에서 “공동지점(여러 은행이 한 공간에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 운영이나 은행 대리점 제도 도입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