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2030의 분노는 이제 시작이다

분노는 순수한 감정이다. 인류가 문명사회를 건설하기 전부터 분노라는 감정은 존재했다. 인간이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천인공노할 범죄나 부당함에 분노를 느낀다. 두번째는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받는 상황이다. 가까이 있는 돌도끼로 분노를 표출했던 원시사회와 달리 문명사회에서 분노는 비교적 세련된 방식으로 표출한다. 대표적으로 투표가 있다.

2030세대는 분노하고 있다. 그들의 분노는 어느날 갑자기 끓어오른 게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누적된 감정이다. 이들 세대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고통을 받았던 가정에서 자란 ‘IMF 시대의 아이들’이다. 물론 당사자인 부모만큼 고생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힘들어하는 부모를 보면서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

김범수 경제부 기자

또한 이들은 하루아침에 다니던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했던 부모님을 보면서 의식주로 대표되는 ‘생존’에 예민해졌다. 2030세대가 어렸을 때부터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려고 오랫동안 노력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이들 세대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조국 사태’부터다. 생존을 위해 더 나은 직업을 갖기 위한 2030세대의 노력을 일순간에 허망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쉽게 의학전문대학원에 간다는 현대판 음서제도를 보며 불공정에서 오는 분노를 느꼈다.

또한 연약하고 위태로운 2030세대들은 어렵게 얻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몇몇 위정자의 음탕한 말과 손길도 참아냈지만, 가슴속에서 터지는 분노와 사무치는 원통함은 견뎌내지 못했다.

분노의 기폭제가 된 수도권 집값 폭등은 청년 세대의 생계를 정면으로 위협했다. 2030세대가 월급을 쪼개고 쪼개서 한 해 2000만원을 저축한다 해도 서울시내 아파트를 구입하려면 50년 넘게 걸리는 현실이다. 이들은 사랑과 결혼을 포기할 수는 있었지만 분노는 잊지 않았다.

좋은 권력을 도모할 수는 없어도 나쁜 권력을 심판할 수는 있다. 이번 4·7재보궐선거에서 2030세대가 야당을 좋아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야당은 그저 이들의 분노를 보여주기 위한 표현의 도구일 뿐이다. 정치적 무관심으로 보일 수 있는 기권표보다 더 확실하게 분노를 보여주는 것은 야당표이기 때문이다.

타당한 분노 앞에서 거대 여당은 운동권 시대의 망령에 사로잡혀 ‘꼰대짓’으로 대응했다. 2030세대가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교육을 받았고 경험치가 부족한 탓이란다. 또한 ‘야당은 더 나쁜 놈들이니 우리를 뽑아 달라’는 차악논리로 호소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2030세대는 어리석지 않다. 당장 지난 탄핵 정국 때도 모든 것을 제쳐두고 추운 겨울날 가장 앞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다. 공정이 사라진 시대에서 생계마저 위협을 받아 생긴 정확한 분노를 읽지 못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평범한 시민의 분노를 알지 못했던 프랑스 루이16세는 단두대로 끌려갔다. 자, 분노는 이제 시작이다.

 

김범수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