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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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따사로운 봄날 해방촌에 가다

‘이태원’은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소
소설 속 동네는 고층 아파트 지대로

봄날은 좋다. 꽃도 좋지만 새순처럼 좋은 것은 없다. 그 연약하고 부드럽고 연푸른 빛깔은 붉고 노랗고 흰 빛보다 매혹적이다.

반대편에는 갈월동 쪽으로 통하는 지하차도가 있는 사거리에서 후암3거리 방향으로 꺾어든다. 바로 남영 우체국 정거장이 나오고 그 앞에 맛집으로 이름난 만두집이 있다. 나는 한 번도 먹어보질 못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마을버스 2번이 지나다니는 미군부대 높은 철조망 담장 길을 타고 올라가면 후암동 종점 삼거리가 나타난다. 바로 그 근처에 용산 중고등학교가 있고 그 정문 앞에 옛날 이태원 자리 표지석이 놓여 있다. ‘이태원터’라는 제목 아래 “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 근교 네 숙소의 한 곳”이라는 설명글이 새겨져 있다.

사전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역원제가 있어 역은 파발이나 관리에게 말을 대여해 주는 시설이며 원은 관리들,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이태원은 그 하나였던 것인데 나는 이 이태원(梨泰院/利泰院)을 마치 이태원(異胎院)으로 상상하고 해왔다. 근방에 미군기지가 있고 옛날부터 외국 사람들이 모여 산 곳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는데, 나만의 생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후암동 종점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108계단’ 엘리베이터가 나타난다. 안내판에, ‘해방촌 108계단 경사형 승강기’라고 쓰여 있는데, 저 위 해방촌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이다.

이 108계단의 유래가 있다. 옛날 이 계단은 일제강점기에 ‘경성호국신사’로 올라가는 진입로였다는 것이다. 일본인 전몰자들 가운데 조선과 관련된 자들을 기리고자 한 시설로 1943년 11월 26일에 완공되었지만 지금 남은 흔적은 이 계단밖에 없다. 계단 위쪽에 붙어 있는 설명 팻말에 의하면 이 신사는 단순히 일본인들뿐 아니라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학도지원병들을 포함한 조선인 징집자들까지 염두에 두고 지었다고도 한다.

승강기는 정말 경사형으로 되어 있어 언덕을 천천히 올라가는 느낌을 주는데, 이렇게 올라가면 이제 행정구역으로 용산2가동이라고 되어 있는 ‘해방촌’을 만나게 된다. 사실은 아래부터 위까지 다 해방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옛날 해방촌 집들은 남아 있는 게 별로 없고 전부 1990년대쯤 새로 지었을 듯한 다세대 빌라주택들이 가파른 언덕 위로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쪽 삼각지며 서울역 가는 큰길 옆에 새로 들어선 높은 빌딩들이 용산의 새로운 변화를 실감나게 한다. 그 사이로, 아하, 월남작가 이호철 선생이 1966년경 신문에 연재해서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던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마치 ‘복지(福地)’와도 같은 이미지로 떠올렸던 도원동, 도화동, 만리동, 공덕동 쪽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작가는 서울은 높은 담벼락에 무서운 개 조심하라는 팻말이나 써붙인 정감 없는 고급주택투성이인 데 반해 서민촌은 훨씬 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민촌 하고도 금호동, 해방촌 같은 곳은 요 근래에 급하게 부풀어 올라서 그런 뜨내기다운 냄새가 풍기지만 도원동, 도화동, 만리동, 공덕동 근처는 서울 본래의 서민 냄새가 물씬물씬 난다”고 써 붙였던 것이다.

이제 세월이 몇 바퀴를 또 굴러서 바야흐로 2021년씩이나 되는 이때 이호철 선생이 ‘복지’를 바라보듯 내려다보던 동네는 고층 아파트 지대로 전격 변모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서민들 사는 복지는 서울에서 어디 가야 찾을 수 있으련가.

그에 비하면 아직도 서민 냄새 물씬 풍기는 해방촌을 뒤로하고 승강기를 다시 타고 내려오는데 웬 노부부께서 함께 타셨다. 이 동네 분이냐고 여쭈어보니 지금은 살지 않는다고, 일년 전에 아파트로 이사를 가셨다고 하시고는, 다시 이 해방촌에서 60년을, 그것도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하셨다. 여기 들어오셨던 때가 1960년이었다고, 정확하게 기억하셨다.

나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참, 귀인분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이분들이야말로 이 해방촌, 해방 때 귀환민들부터 시작해서 6·25전쟁 피란민들로 이루어진 이 동네의 살아 있는 증인들이셨던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