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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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서 더 아름답다… 천년고찰 송광사의 봄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송광사 가는 길 40살 벚나무 ‘분홍 터널’
핑크빛 잎들 바람따라 꽃비 되어 흩날리다
화려함 짧아 아쉽지만 초록 생명력 잉태하니 찬란

상광 공기마을 편백숲 치유 숲 트레킹
마음도 몸도 녹색으로 물들다
모악·경각산 거느린 구이저수지 수채화 풍경
송광사 벚꽃

언제 이리 폈을까. 여리여리한 연분홍 잎들 바람 따라 꽃비 되어 흩날린다. 야속하게도 아주 짧게 왔다 가버리는 벚꽃. 잠깐 딴짓하는 사이 몰래 다가와 한껏 화려한 봄날 저 혼자 그려놓더니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며 작별을 얘기한다. 열흘 남짓. 그 화려함이 너무 짧기에 벚꽃 스러진다고 다들 슬퍼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만개한 벚꽃보다 꽃잎 밀어내는 파릇한 이파리 돋을 때 벚꽃은 더 찬란하단다. 한해를 살아갈 강인한 초록의 생명력이 그 안에 가득 담겨 있기에. 벚꽃이 스러져도 슬프지 않은 이유다.

송광사 벚꽃길

#송광사 순결한 벚꽃 내년에 더 찬란하겠지

 

순결, 절세미인, 아름다운 영혼, 정신적인 사랑. 벚꽃은 생김새만큼 꽃말도 순수하고 화려하다. 또 하나 있다. 학생들에게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다. 하필 중간고사 때마다 활짝 피어 시험을 다 망쳐놓아서다. 대학 시절을 기억한다. 봄이면 벚꽃터널을 만들며 캠퍼스를 온통 핑크로 물들이던 풍경. 그러니 중간고사가 코앞이지만 도서관에 앉아 아무리 책을 들여다봐도 같은 페이지만 맴돌 수밖에. 결국 커다란 창밖으로 만개한 벚꽃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에라 모르겠다’며 뛰쳐나가고는 했지.

 

벚꽃은 누군가에게는 대학 시절의 추억이고 벚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영화 ‘4월 이야기’ 같은 짝사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이런 낭만을 2년째 앗아갔다. 더구나 올해는 벚꽃 개화 시기가 일주일 넘게 앞당겨져 3월 말부터 이미 만개를 해버렸다. 그래도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워 드라이브 스루로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전북 완주 송광사 벚꽃길을 달려본다.

송광사 벚꽃길

소양면 송광사로 연결되는 2km가량의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오도천을 사이에 두고 왼쪽 송광수만로와 오른쪽 대흥봉덕길에 4월이면 벚꽃이 흐드러진다. 송광수만로 벚꽃도로 입구에 들어서자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송광사 방면 도로 양쪽을 따라 수령 40년 된 아름드리나무가 환상적인 분홍의 터널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장관이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가지들은 오도천 위로 휘어져 내리며 벚꽃을 물 위에 드렸다. 다들 벚꽃구경하러 나선 차량이니 거북이처럼 아주 느리게 움직여도 괜찮다.

문화교 인근 벚꽃

봉덕교 지나 문화교를 건너 대흥봉덕길로 좌회전하면 도로폭이 아주 좁아지며 더욱 운치 있는 벚꽃터널이 기다린다. 그냥 가기 아쉬운 아빠는 마스크를 쓴 아가에게 목말을 태워주고 연인들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잠시 인생샷을 찍는다. 아름다운 곳이지만 양쪽으로 오고 가는 차들이 뒤엉켜 좀처럼 도로를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

송광사 일주문 벚꽃

#천진난만 동자승 벚꽃 같은 미소에 흐뭇

 

벚꽃터널을 지나 송광사 일주문 앞에 섰다. 고풍스러운 전통찻집 백련다원과 달팽이 그림이 새겨진 순례길 표지석이 여행자들을 맞는다. ‘아름다운 순례길’ 2코스 트레킹을 시작하는 곳이다. 송광사에서 시작해 천주교 순교자 묘지와 피정의 집이 있는 천호성지까지 27.1km가량 이어지며 8시간 정도 걸린다. 초창기 천주교의 역사와 고난이 담긴 길을 송광사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종남산 송광사’. 일주문 현판에 쓰인 것처럼 송광사는 종남산 품에 안겨 있다. 일주문 앞에서 서면, 금강문, 사천왕문, 대웅전이 차례로 보일 정도로 일직선으로 배치된 점이 독특하다. 백제 때 영험한 샘물이 있는 자리에 백련사가 세워졌고 신라말에 보조체징 선사가 선종을 뜻하는 소나무가 널리 퍼진다는 뜻을 담아 송광사(松廣寺)로 개칭했다고 한다. 사찰 역사를 기록한 ‘송광사개창비‘를 토대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원래 일주문이 지금 위치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융성하던 시절에는 엄청난 규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서 깊은 사찰은 봄꽃들로 생기 넘친다. 금강문 앞 왼쪽에서 짙은 노랑의 수선화가 여행자들의 마음을 환하게 열어준다. 모든 번뇌를 없애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게 해준다는 금강의 지혜를 얻기를 바라며 천왕문을 들어서자 키가 4m가 넘는 거대한 사천왕상이 압도한다. 흙으로 빚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조 사천왕상으로 보물로 지정됐다.

 

천왕문을 지나면 동자승 5명을 품에 안고 있는 포대화상이 푸근한 미소로 반긴다. 귓불은 축 늘어지고 배가 불룩한 비만한 몸집은 아무런 근심이 없어 보인다. 중국 오대시대 후량의 고승으로 알려진 포대화상은 일정한 거처 없이 항상 긴 막대기에 포대 하나를 걸치고 다니며 어려운 이들을 돌봐줬다고 한다. 천왕문을 지나면 연꽃 모양 약수 옆에 자목련이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대웅전 오른쪽 천진동자불상은 실눈을 한껏 치켜 올리며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아이처럼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범종루와 대웅전

2층 누각으로 지은 독특한 범종루와 대웅전, 내부의 ‘삼세불’ 소조 석가여래 삼불좌상도 역시 보물이다. 높이 565cm로 우리나라 소조상 중 가장 크고 섬세하게 조각된 점이 인상적이다. 조각승 17명이 4년에 걸쳐 1641년(인조 19년)에 완성했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가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외적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이 명복을 빌기 위해 삼존불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이곳에서 나왔다. 대웅전 처마 끝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풍경소리가 고즈넉하다. 대웅전 뒤 숲에서는 대나무 잎들이 사각사각 부대끼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와 마음의 번잡함을 씻는다. 부도탑까지 꼭 보시길. 아주 커다란 벚꽃나무 한 그루와 노란 단풍이 아직 그대로인 대나무숲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풍경을 만난다.

 

#모악산과 경각산의 사랑이야기

 

상관면 죽림리 공기마을 편백나무숲은 힐링하기 좋은 곳이다. 1976년 마을주민들이 산자락에 편백나무 10만그루를 심어 민둥산을 거대한 숲으로 바꿨다. 무려 85만9500㎡(26만여평)에 편백나무 10만그루, 잣나무 6000그루, 삼나무, 낙엽송, 오동나무 등이 빽빽하다. ‘치유의 숲’ 표지판 뒤로 오솔길이 시작된다. 한치의 굴절도 없이 수직으로 쭉쭉 뻗어나간 편백나무가 이채롭다. 짙은 편백나무 피톤치드를 깊이 들이마시자 몸과 마음이 봄의 활력으로 가득해지는 기분이다. 오솔길이 상당히 가팔라 처음에는 좀 힘들지만 10여분만 오르면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엄마를 따라나선 초등학교 여자아이들은 아주 신이 났나 보다. 병아리처럼 “야채주스 한병에 이백억원 삐악삐악♩♬∼”하며 출처를 알 수 없는 노래를 도돌이표처럼 떼창하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난다.

구이저수지 벚꽃

인근 구이저수지로 향한다. 속이 탁 트인 호수와 벚꽃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즐기며 봄기운을 즐기기 좋다. 저수지는 모악산과 경각산을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데 두 산의 사랑이야기가 재미있다. 뾰족하게 솟은 경각산은 고래 뿔 형상을 지녀 예로부터 남성을 의미하고 모악산은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 때문에 여성으로 여겨진다. 먼 옛날 경각산이 모악산에 청혼을 했고 아름다운 결혼 덕분에 구이면에 생명과 풍요의 상징인 저수지 물이 넘쳐흐르게 됐다는 전설이다.

 

사랑을 약속하는 연인들의 열쇠가 주렁주렁 달린 하트 포토존을 중심으로 왼쪽은 경각길, 오른쪽은 모악길이다. 아들 낳고 싶으면 경각길, 딸 낳고 싶으면 모악길로 가라는 안내글에 웃음이 빵 터진다. 저수지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커다란 붓에 분홍물감을 듬뿍 적셔 푹 찍어놓은 것처럼 산중턱에 자연스럽게 자란 벚나무 군락이 잔잔한 호수에 투영되며 수채화를 만들어 놓았다. 저수지 산책로는 8.8km가량 이어지는데 인공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마치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완주=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