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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열풍에 그래픽카드 씨 말랐다...게이머 공분 산 '수입사 채굴' 소문 확인해보니

 

요즘 컴퓨터 부품인 그래픽카드는 웃돈을 얹고도 구하기 힘듭니다. 배보다 배꼽이 큰 수준입니다.

 

실제 가격비교 사이트 다나와에서 칩셋 제조사 엔비디아가 올 2월 약 37만원(330달러)에 출시한 ‘지포스 RTX 3060’이 현재는 최저가 149만원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56만원(500달러)으로 출시한 ‘지포스 RTX 3070’은 지난달 말 한때 7배가 넘는 400만원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컴퓨터 부품을 사려고 중고차 값을 줘야 할 이 지경까지 온 이유는 전 세계적인 암호화폐(가상화폐) ‘채굴 열풍’의 영향이 컸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시각입니다.

 

암호화폐를 시장가로 사지 않고 직접 발급받기 위해선 빠른 컴퓨터 연산(채굴)이 필요한데, 이때 반드시 필요한 부품이 그래픽카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소비자는 컴퓨터 1대당 그래픽카드 1개만 필요하지만, 채굴업자는 보통 채굴기 1대당 6∼7장을 사용해 공급 대비 수요를 키우는 주요한 요인입니다.

 

특히 그래픽카드로 채굴했을 때 효율이 좋은 이더리움의 가격이 올해 들어 고공행진 중이어서, 채굴 수요를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복수의 그래픽카드 수입사 관계자는 “반도체 수급난으로 그래픽카드 생산량이 줄어든 데다 그마저 중국 채굴업자들이 쓸어가면서 수입할 수 있는 제품이 크게 줄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줄어든 물량으로 이익을 내려면 ‘수입사→총판→도매→소매’로 이어지는 유통 단계마다 마진을 더 붙일 수밖에 없어 최종 소비자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겁니다.

 

◆전례없는 공급 가뭄에 수입사는 ‘비난 화살’

 

그래픽 카드 1개 값이 예전 PC 완제품 가격보다 비싸진 탓에 가격비교 사이트에서는 “이 가격이 말이 되나”, “작작들 하라”, “(가격이 내려갈 때까지) 1년은 더 기다려야겠다” 등 원성이 즐비합니다.

 

마치 암호화폐 투자자처럼 “쌀 때 사길 잘했다”는 자랑까지 여럿 보입니다.

 

그래픽카드의 주용도는 일반 사용자에게는 PC의 게임 성능 향상입니다. 채굴업자들 탓에 애꿎은 게이머와 PC방 사업주만 물량이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불만이 커지는 형편입니다.

 

일각에서 수입사를 의심하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습니다.

 

수입사들이 국내로 들여온 그래픽카드를 시중에 풀지않고 직접 채굴장을 운영하면서 쓰고 있는 게 아니냐는 뜬소문이 일기 시작한 겁니다.

 

이 소문은 지난 3월 이름난 정보기술(IT) 유튜버를 통해 처음 알려졌는데, 소비자들 사이에선 “그럴 줄 알았다”, “아직 소문일 뿐”이라며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소문의 실체에 대해 소비자들의 관심이 큰 만큼 정말 근거가 있는 것인지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 영상에서 내용을 보다 간단명료하게 정리했습니다.

 

 

◆‘암호화폐 채굴업’ 등록한 수입사 존재 “실제 사업은 안 했다”

 

세계일보 영상팀이 만난 PC 부품 유통업계 관계자 A씨는 엔비디아가 각 수입사들에 공급했다는 그래픽카드에 비해 시중에 풀린 물량이 너무 적다는 점을 이런 소문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A씨는 글로벌 그래픽카드 칩셋 1위 생산업체인 엔비디아 측에 지난해 4분기 국내 공급현황을 문의해 메일로 답변을 받았다며 구체적인 수치도 제시했습니다. 이 기간 엔비디아 칩셋을 사용한 그래픽카드는 국내 수입사 약 12곳에 모두 34만3000개가 공급됐습니다.

 

수입사별로는 소량을 들여온 일부를 빼고 7곳이 각자 3만∼6만여개를 들여온 것으로 집계됩니다.

 

A씨는 “총판에 확인했더니 4분기 시중에 공급된 물량은 수입사 대부분 평균 5000∼1만개에 불과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수입사에서는 들여온 물량 대비 80% 수준인 5만개의 행방이 묘연하다고도 했습니다.

 

수입사가 재량껏 유통 속도를 조절한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음 분기에도 제조사로부터 비슷한 물량을 배정받으려면 수입사는 들여온 모든 물량을 해당 분기 안에 유통시켜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그래픽카드가 재고로 쌓여있을 리 없고 어디선가는 전부 쓰이고 있을 것이란 주장입니다.

 

한 업체는 몇년 전 정관 변경과 함께 법인 등기에 ‘암호화폐 채굴업’을 목적으로 등록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등록한 시기는 2018년 4월이며, 한 채굴장 위탁 운영업자를 통해 확인한 결과 2017년 말∼2018년 초는 국내에서 암호화폐 열풍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이 업체는 같은 시기 ‘블록체인 플랫폼 개발사업’과 ‘IOC(암호화폐공개) 관련한 컨설팅 및 전문 서비스’ 등 블록체인과 전자금융 관련 업종 8개를 함께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소문을 믿고 있는 소비자들에게 오해를 살 정황인 만큼 해당 업체에 어찌된 일인지 묻자 “등록만 했을 뿐 실제 사업은 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이 업체 관계자는 “블록체인과 관련한 여러 신사업을 추진하려던 것이고, 암호화폐는 관심 분야가 아니었다”며 “사업 목적을 하나씩 추가할 때마다 주주총회를 열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들어 추진 가능한 블록체인 사업을 한꺼번에 넣는 과정에서 암호화폐 채굴업이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등기에 올린 대로 나중에라도 암호화폐 채굴업을 시작할 가능성은 없는지 묻자 “회사의 관심사는 코인이 아닌 암호화폐에 적용되는 블록체인 기술”이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소비자 원성 높지만...공정위 개입은 “불가”

 

일각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 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이로 인해 비정상적인 가격 상승이 일어났는지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공정위 측은 “민원이 들어오면 검토는 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개입하긴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한 관계자는 “제조사가 출고 조절을 한 게 아니라 유통사들이 정당한 이익 추구를 위해 가격을 올렸다면 공정거래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제품의 가격 인상이 보편적인 국민 경제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정부가 개입할 수 있지만 그래픽카드가 이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고, 개입을 한다면 오히려 반헌법적인 조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가격 인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건데, 소비자들은 금방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암호화폐가 인기를 얻을 때마다 그래픽카드의 가격까지 영향을 입을 것이란 게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한 암호화폐 채굴업자는 “(반도체 수급난이 없었던) 3, 4년 전 채굴 열풍에 이어 코인 가격이 떨어진 뒤 그래픽카드 가격도 3∼4개월 후 뒤따라 떨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쿨엔조이와 AMD 라이젠 등 하드웨어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가격이 자연스럽게 진정되기는 글렀다”, “좀 내리는 듯 하더니 다시 오르고 무한 반복이다”, “각 국가에서 제재하지 않으면 계속 반복될 것 같다”는 등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A씨는 “사태가 장기화하면 조달 시장이나 게임 시장 등 PC 수급과 콘텐츠 수요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단순히 게임 애호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글·영상=신성철 기자 s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