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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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미칼럼] 이제 보수가 혁신할 때다

‘이준석 바람’ 혁신 연대로 이어져야
포용·공감·통합의 가치 실천이 관건

정치 현장을 취재하다 보면 허를 찔릴 때가 있다. 50년 만의 역사적 정권 교체라는 1997년 김대중(DJ) 대통령의 당선이 그랬고, 2002년 연거푸 낙선했던 ‘바보 노무현’의 화려한 부활이 그랬다. 최근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36세 이준석도 그렇다. 허를 찔리는 건 기존의 정치 문법으로 예측하기도, 해석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치 문법은 주류 세력이 권력의 승계 방식, 후계자를 정하는데 호남 출신의 DJ는 평생 소수파였고 노무현은 비주류 정치인이었다. 이준석은 영남 출신이 아니고 국회의원에 선출된 적도 없다.

그동안 혁신은 주로 진보 진영에서 이뤄졌다. 권력 지형에서 소수 처지이다 보니 이를 뒤집기 위해 뭔가 새로운 전략을 시도한 덕분이다. 조세형 전 새천년민주당 총재권한대행은 살아생전 자신의 정치 인생 최대 걸작으로 2002년 국민경선제 도입을 꼽곤 했다. 전국을 도는 순회 경선이 치러지면서 누구도 예측 못한 ‘노풍(盧風)’이 만들어졌다. 보수 진영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오랜 기간 유지해온 탓에 도돌이표처럼 안주했다. ‘선거의 여왕’ 박근혜, ‘샐러리맨의 신화’ 이명박 같은 개인기와 계파에 의존했다.

황정미 편집인

주변 지인들이 이준석의 당선 여부를 물어올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그 밖의 중진 정치인들은 화제에도 오르지 못한다. 문제적 인간, 이준석을 바라보는 프리즘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공통된 관점은 그를 통해 변화의 욕구가 분출됐다는 것이다. 그의 배경과 언변을 신뢰하진 않아도 오직 그만이 판을 엎을 수 있다는 기대가 정치 경륜, 조직력에 좌우됐던 기존의 당 대표 경선 문법을 깼다. 그의 도전이 설사 실패한다 해도 경종을 울렸다는 얘기는 믿지 않는다. 회귀 본능이 강한 국민의힘 전력을 감안하면 개혁 논쟁은 말짱 도루묵이 될 공산이 크다.

이준석의 도전은 성공했을 때만 의미가 있다. 냉전 시대 이래 굳어진 한국 보수를 혁신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보수 정당은 물론 한국 정치 역사상 첫 30대 당수의 탄생은 새로운 혁신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DJ가 수혈한 386 세대가 한때 새 정치의 주역이 됐듯이 ‘이준석 키즈’가 정치 판을 바꿀 수 있다. 이번 당 대표 경선에서 이준석과 초선 의원 김웅, 김은혜가 물꼬를 트긴 했지만 더 넓은 혁신의 연대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가 당 대표가 된다면 최소한 박정희, 박근혜를 팔아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해온 이들이 발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준석의 등장에 영국 보수당 사례가 종종 소환된다. 이미 1990년대 그와 같은 나이의 당 대표(윌리엄 헤이그)가 나왔다는 건 에피소드일 뿐이다. 300년 역사의 보수당이 여전히 건재한 비결은 시대 변화에 조응한 혁신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완전히 새로운 세대로 바꾸겠다”던 40대 젊은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온정적(compassionate) 보수주의’로 약자 배려, 환경 보호 정책에 공을 들였다. 서울대 강원택 교수는 ‘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에서 “영국 보수당은 교조적이고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포용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시대 변화에 뛰어난 적응력을 가졌다”고 썼다.

적폐청산의 대상이었고 ‘꼰대 정당’ 딱지가 붙은 국민의힘은 “정상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김웅 의원 출사표) “가장 낮은 곳의 아픔을 공감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수이고, 그 실천이 진정한 변화”라는 김 의원 주장에 동감한다. 안정적 변화를 꾀하는 보수의 핵심 가치는 통합, 공동체 정신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명명된 문명전환 흐름은 또 하나의 시대적 과제다. 올해 세계문학상 수상작 ‘언맨드(Unmanned)’(채기성)는 로봇에 일을 뺏긴 라이더들의 시위로 시작된다. AI(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일상을 대체하는 로봇이 통제에서 벗어나 인간과 충돌하는 장면들이 낯설지 않다. 눈부신 기술 발전이 가져올 재난적 상황에 누가,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화두를 던진다. 직관적이고 대담한 해법을 디지털 세대가 주도하는 게 맞다. 이준석의 젊음이 새 리더십과 등치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보수를 혁신할 마중물 역할이면 충분하다.

 

황정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