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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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김여정이 한·미훈련 중단 압박해도 할 말 없다는 정부

김 “남측 결정 예의주시” 담화
주권 문제 거론해도 침묵하면
국가안보·한미동맹 위험해져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그제 밤 담화를 통해 “며칠간 한·미 합동군사연습이 예정대로 강행될 수 있다는 기분 나쁜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면서 “남조선 측이 8월에 또다시 적대적인 전쟁연습을 벌려놓을지 아니면 큰 용단을 내릴지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 연합훈련이 실시되면 “남북관계의 앞길을 더욱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한·미 연합훈련을 예정대로 진행하면 남북관계를 다시 경색시킬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위협한 것이다. 남북 통신선 복원에 대해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청구서로 내민 셈이다.

한·미 연합훈련은 영토 수호를 위한 주권의 문제다. 동맹 관계인 한·미가 협의해서 결정할 일이지 제3자인 북한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여정이 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건 주권 침해나 마찬가지다. 북한이 이처럼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데는 문재인정부 책임도 크다. 남한을 압박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북한에 줘왔기 때문이다. 김여정이 지난해 6월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응분의 조치라도 하라”고 요구하자 대북전단금지법이 제정됐다. 지난 6월 한·미 워킹그룹 해체도 김여정이 비난한 뒤 이뤄졌다. 오죽하면 ‘김여정 하명’ 논란이 불거졌겠나.

정부의 대북 저자세는 김여정 담화에 대한 대응에서도 되풀이됐다. 방어훈련이라고 반박하고 비판해야 마땅한 일인데도 통일부와 국방부는 “논평할 내용이 없다”며 입을 꾹 닫았다.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통일부는 “한·미 연합훈련이 한반도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계기가 돼선 안 된다는 입장에서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 왔다”고 밝혔다. 한·미 연합훈련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오랜 교착 끝에 북한과의 대화 재개 가능성이 커진 상황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대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는 건 필요하다. 꽉 막힌 남북관계를 풀고 북한 비핵화 협상의 불씨를 되살리려면 북한과 테이블에 마주 앉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 안보태세 유지에 긴요한 한·미 연합훈련을 대북 협상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정부가 얼마 남지 않은 임기 안에 남북관계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조급증 때문에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한·미동맹에 균열을 가져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