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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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칼럼] ‘늙은 군인의 노래’ 유감

국군의 날 공식행사 피날레 장식
군가는 충성심·전우애 고양 역할
명곡이지만 애잔한 곡조·자조적
군 힘빼기 우려… 부르지 말았으면

살다 보면 잊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게 된다. 그제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깜빡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평생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내 경우는 제대신고다. 좋았던 과거를 서서히 잊어가는 나이임에도 아직도 단 한 마디도 틀리지 않고 할 수 있다. “신고합니다. 병장 ○○○은 ○○○○년 ○월 ○일 보병 제○○사단으로부터 보병 제○○ 예비사단으로 전역을 위한 전출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정말이지 난 평생토록 이 신고만큼 감격스레 목청을 높인 적은 없다.

기성세대들의 군생활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D.P.’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D.P.를 몰아쳐 본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퍅했던 군생활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 발톱이 빠졌던 행군, 악에 받친 유격훈련, 무자비한 구타로 기억되는 군은 내게 젊은 날의 상처로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힘들었던 군대도 ‘우리 기쁜 젊은 날’쯤으로 나에게 추억된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매체경영학

아들에게 들려 줄 땐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제법 재미있고 낭만적인 무용담으로 각색된다. 그만큼 군대는 기성세대에게 씁쓸 달콤한 기억으로 살아 있는 생물이다. 여친이 왔다는 전갈에 속눈썹이 휘날리도록 위병소로 뛰어갔던 기억, 들기름에 잰 된장에 찍어 먹던 양파의 매서운 맛 등은 어제 같이 선명하다.

군대의 기억을 떠올리면 반드시 따라오는 게 있다. 군가다. 노래방 덕분에 가사를 끝까지 기억하는 노래는 없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대개 허물허물 흥얼거리고 만다. 그러나 군가는 다르다. 여전히 몇몇 군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동이 트는 새벽녘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애창 군가들이다. 논산 훈련병 시절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으로 시작되는 ‘진짜 사나이’를 줄창나게 불렀지만 너무 직설적어서 세련미가 떨어진다. 군가, 참 많이도 불렀다. 행군하며 불렀고 빳다 맞으면서도 불렀다. 뜬금없이 군가 얘기를 떠올리는 것은 최근 군관련 행사를 접하면서다.

지난 10월 1일은 제73주년 국군의 날이었다. 사상 최초로 경북 포항에서 해병대 주관으로 진행됐다. 신세대 장병들은 늠름했다. 문제는 군가다. 군가는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이 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 군인의 자부심, 전우애를 고양시킨다. 그러나 이날 피날레를 장식한 군가는 군가가 아닌 대중가요 ‘늙은 군인의 노래’였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노래다. 오랜 세월 시위현장에서 ‘늙은 투사의 노래’로 탈바꿈해 단골로 불렸다. 1974년 육군 12사단 51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로 복무 중이던 김민기가 전역을 앞둔 하사관(상사)의 부탁을 받고 만들어준 노래로 알려져 있다. 대가는 부대원들과 나눠 마실 막걸리 두 말이었다고 한다. 역시 김민기다. 서정성이 뛰어나고 멜랑콜리한 노랫말 덕분에 일찌감치 명곡의 반열에 오른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가 군관련 공식행사에 불려져서는 곤란하다. 대중가요라서 그런 게 아니다. 애잔한 곡조와 자조적인 노랫말은 군의 사기를 빼기에 딱이다. 군가와는 당연히 거리가 멀다. 이런 이유로 오랫동안 군에서 불리는 것조차 금지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두 번도 아니고 군관련 행사 때마다 번번이 이 노래를 부르는 의도에 대해 ‘군 힘빼기’라며 군의 불만이 대단하다. 물론 공식 군가보다는 군을 배경으로 한 대중가요가 가슴에 더 와 닿을 수도 있다. 이 노래가 그렇다.

하지만 이런 노래를 국군의 날 행사에서 부르는 것은 안 된다. 사기진작은커녕 허무적인 가사와 상대적으로 느린 곡조로 맥빠지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 군인들은 이 노래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이 노래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군 관련 행사 때마다 단골로 불리고 있다.

공식행사에 공식노래가 필요하다. 군 관련 대중가요로 또 다른 명곡인 ‘전우야 잘 자라’를 공식행사에 부르지 않았던 이유와 같다. 불후의 명곡이지만 가사가 주는 비극성 때문에 군대에서 부르는 것이 금지된 것을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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