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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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칼럼] 대외전략 새 판 짤 때다

세계화·자유주의 국제질서 쇠퇴
지정학적 대립·국가주의 부상
새 정부 전략구상·리더십 안 보여
국제무대에서 제 목소리 내야

독일 나치 침략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군인 출신 지정학자 카를 하우스호퍼는 민족국가의 생존과 번영이 ‘생활공간(Lebensraum)’에 달려 있으며, 생활공간 추구가 모든 정책의 기초라고 했다. 그는 유라시아 심장지대를 주시하면서 독일 동쪽의 빈 공간을 세계 지배의 관문으로 여겼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회고록 ‘어제의 세계’에서 “나치즘의 침략 정책을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좁은 국민적인 것으로부터 세계적인 것으로 몰고간 것은, 히틀러의 가장 광포한 조언자들의 어떤 이론이 아니라 그의 이론이었다”고 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쇠퇴하고 지정학적 대립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다시 지정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지정학은 지리적 환경이 국제정치나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융합학문이다. 미국 지정학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은 지정학적 개념이란 지리학적 개념과 힘의 역동성이 합쳐진 것이라고 했다.

박완규 논설위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500년 동안 세계는 유라시아 강국에 의해 지배됐다”며 “유라시아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목표”라고 했다. 유라시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유라시아의 5개 ‘지정학적 중심축(pivot)’ 가운데 첫손에 꼽았다. “독립 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가 러시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없이 유라시아의 제국이 될 수 없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를 말해준다. ‘지정학의 기초’를 펴낸 알렉산드르 두긴 등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자들이 이념적 배경을 제공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의 동진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나치의 침략정책을 연상시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두 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완강히 저항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도 고강도 경제제재에 나섰지만,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을 점령한 데 이어 남부지역 완전 장악을 전쟁 2단계 목표로 내걸었다. 인근 몰도바가 전화에 휩싸일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번 전쟁을 끝내려면 적어도 수년은 걸릴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러시아와 미국이 세계 패권을 놓고 맞선 데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겹치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이 되고 있다. 미국·러시아의 대립으로 중국의 전략적 공간이 커질 경우 대만이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지도 모른다. 경제 분야에선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돼 국제 원자재·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세계화가 퇴조하고 국가주의가 부상한 데다 강대국들이 힘의 논리를 앞세우면서 국제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질서의 현상 변경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신냉전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를 냉철하게 판단해 대외전략의 새 판을 짜야 할 때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가장 취약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4대 강국에 둘러싸인 데다 북한은 핵 무력을 강화하면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한다. 기존의 ‘줄타기 외교’나 ‘전략적 모호성’ 같은 기조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출범을 눈앞에 둔 새 정부의 대외전략 구상과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새 대통령 취임 후 10여일 만에 열릴 한·미 정상회담이 걱정이다. 구체적인 대외정책 청사진 없이 임기응변식으로 치러선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국제 정세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다. 강대국들 간 패권 경쟁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새 정부가 대외정책에서 총체적 위협 요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면 관련 부처들 간 조율을 주도할 컨트롤타워부터 서둘러 정비해야 한다. 앞으로 국제질서 재편 논의에도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세계 10위 경제력을 지닌 민주주의 중견국답게 국제무대에서 제 목소리를 내면서 일관성 있는 외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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