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처음으로 직접 만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 주도의 글로벌 질서에 반기를 들며 양국 간 ‘반미 연대’의 결속을 대외에 과시했다. 미국의 고립주의·패권주의에 맞서 “질서 있는 다극화”를 주도하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8일(현지시간) 러시아를 국빈방문 중인 시 주석은 모스크바 크레믈궁에서 푸틴 대통령과 약 3시간30분 간 회담을 가진 뒤 한반도와 우크라이나, 국제질서 전반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시 주석을 “친애하는 동지”로 부르며 환대했고, 시 주석도 “나의 오랜 동지”라 화답했다. 두 정상은 이날 공식 오찬과 티타임까지 포함해 약 7시간30분을 함께하며 민감한 현안들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시 주석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을 맞은 러시아의 전승절(9일) 기념 열병식 참석을 계기로 전날부터 나흘 일정으로 모스크바를 찾았다. 지난 2013년 국가주석 취임 후 11번째 러시아 방문으로 단일 국가 기준 최다 방문국이기도 하다. 이번 방문은 2023년 3월 이후 2년 만의 국빈방문이며, 러시아 전승절 행사 참석은 2015년 이후 10년 만이다.
양국은 이날 채택한 공동성명에서 “정치·외교적 수단만이 한반도 문제의 포괄적 해결 방안”이라고 강조하며 “북한에 대한 일방적 제재와 동북아의 군사화, 무력 압박을 중단하라”고 관련국들에 촉구했다. 특히 “한반도 문제의 전제조건은 주권 존중과 국익의 균형적 고려”라고 명시해 미국 주도의 제재 기조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번 회담은 지난해 5월 푸틴 대통령의 방중 당시보다 다자주의와 국제질서 수호라는 정치적 메시지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 주석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국제사회의 일방주의와 패권적 괴롭힘에 맞서, 러시아와 함께 유엔 중심의 국제 시스템과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를 지킬 것”이라며 미국을 직접 겨냥하지 않으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푸틴 대통령은 시 주석과의 회담이 “매우 생산적이었다”고 평가하며 “양국 관계는 역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어 “양국의 공통된 접근은 국제사회의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면서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이 양국 관계의 핵심 동력임을 강조했다. 러시아는 중국 최대 가스관 공급국으로, 푸틴 대통령은 중국 내 자동차 생산기지 설립과 산업기술 이전, 농산물 수출 확대도 환영한다고 밝혔다.
양국은 이날 공동성명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지지하지만,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저지를 통한 안보 보장 요구를 반복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시 주석은 지난해 제시했던 ‘균형적이고 지속가능한 안보 프레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다자주의와 역사적 진실 수호를 강조하며 우크라이나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시사했다.
중국 측은 이번 회담을 통해 미국의 글로벌 주도권에 제동을 걸고 관세전쟁이라는 경제 전선을 외교전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신화통신은 “중국이 이제는 경제적 체급을 바탕으로 트럼프 1기 시절과는 다른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중국은 올해 미중 무역갈등이 본격화한 이후 관세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반미 여론전과 제3세계 공조에 적극 나서는 분위기다.
반면 푸틴 대통령의 경우 공식 회담에서는 미국을 직접 비판하기보다는 에너지, 무역, 기술 교류 등 양자 경제 협력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공동성명에서는 미국의 이중 억제 전략, 일방적 보호주의, 수출 통제 등을 나란히 비판하며 “러시아와 중국은 협력을 강화하고 군사 협력도 지속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미국이 추진 중인 새로운 우주 기반 미사일 방어망 ‘골든돔’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며 우주가 무력 충돌의 무대로 전환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중·러는 이날 전략적 안정, 달 탐사 협력, 투자 보호 등 3건의 부속 협정에도 서명했다. 전략적 안정 성명에서는 핵보유국 사이의 긴장 고조에 대한 우려와 함께 지상 중·단거리 미사일의 해외 배치 반대 입장도 함께 밝혔다. 양국은 나흘 간 이어지는 시 주석의 국빈방문 일정을 통해 관세 갈등, 우크라이나 종전 문제, 중동 정세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