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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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축협 한도초과 외상거래 321건… 직원 대다수 경징계 [심층기획]

징계수위 낮아 부실관행 키워

조합원·중도매인 대상 외상거래 때
한도초과 남발… 부실채권 양산 우려
제3자가 담보 제공… 십수억대 피해도

배임 성립에도 직원 파면·해임은 ‘0’
수협선 직원 실형 선고 뒤 위법 급감
“외상 초과거래 제동 걸 시스템 시급”
불법시민감시위원회가 지난달 11일 경남 김해시 부경양돈 본점 앞에서 부경양돈의 외상대금 관리 부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A씨는 ‘농협’이라는 이름을 믿고 2017년 7월 자신의 땅을 담보로 제공했다가 큰 피해를 봤다. B축산물유통업체 대표가 A씨에게 “부경양돈농협과 축산물 공급계약을 맺으려면 담보가 필요하다”며 부탁을 해왔다. A씨는 자신의 2만4462㎡ 규모 땅에 부경양돈을 채권자로 20억원의 근저당권을 설정해 줬다. 다만 ‘거래한도는 5억원으로, 외상거래는 10일 이내로, 한 번이라도 연체 등이 있으면 금액을 축소한다’는 계약도 함께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B업체의 외상거래대금 연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부경양돈농협은 거래한도의 4배에 달하는 18억5000만원 상당의 육류를 B업체에 출고했다. A씨는 B업체가 종적을 감춘 후 ‘경매예고장’이 오고 나서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됐다. 부경양돈농협 측은 A씨에게 ‘거래대금을 갚지 않으면 땅을 즉시 경매에 넘기겠다’고 했고, A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연 10%가 넘는 이자로 15억440여만원을 대신 갚아야 했다. 농협은 A씨에게 남은 원금 11억원도 상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A씨는 “‘농협’이 공공기관이어서 당연히 계약대로 거래를 잘 관리해 줄 것이라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며 “담보제공자에겐 이러한 거래사실을 하나도 알리지 않다가 경매예고장을 보내며 상환을 독촉하고 있어 경제적 피해는 물론 정신적 고통까지 입고 있다”고 호소했다.

◆한도 초과한 외상거래 매년 반복돼

농·축협의 한도를 초과한 외상거래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거래는 매년 농협중앙회 등의 감사에서 적발되고 있지만, 징계로 이어진 것은 적어 ‘솜방망이 제재’로 피해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3일 농업계에 따르면 농협과 축협, 수협은 조합원인 농·축·수산업인을 위해 축산물, 농산물, 수산물, 사료, 비료, 동물약품, 농기구류, 어구류 등의 매매거래 때 ‘외상거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농가를 예로 들면, 농작물을 재배할 때 비료와 농기구 등이 필요한데 농작물을 키워 수확해 판매할 때까지 농가엔 수익이 없다. 농협에서 외상으로 농가에 비료 등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농사를 짓기 어렵다. 이 때문에 농협에서 외상으로 필요한 물품 등을 주고, 농민이 작물을 수확해 판매한 뒤 물품대금을 받는 방식의 외상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외상거래는 농·축·수산업인인 조합원뿐 아니라 중도매인에게도 허용된다.

중도매인 등의 외상거래는 ‘수산물 유통판매 업무방법’ 등 내부 규정에 따라 약정기간 동안 외상거래한도를 정해 거래를 하도록 돼 있다. 외상거래한도 부여기준은 정규담보 취득에 따른 기본한도와 채무자 본인의 신용도에 따라 부여된 신용한도로 정하고 있다.

문제는 외상거래 한도를 초과한 거래가 남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도를 초과한 거래는 자칫 장기미수금이 될 수 있고, 지역 농·축협의 부실채권으로 이어져 조합에 손실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한도를 초과한 외상거래는 업무상 배임죄가 성립한다는 법원의 판결도 있다. A씨의 사례처럼 제3자의 부동산 등을 담보로 제공한 경우엔 거래당사자 외 제3의 피해자가 양산될 가능성이 있다.

◆10명 중 8명 ‘경징계’… 솜방망이 제재

그런데도 외상거래를 한도를 초과한 거래는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세계일보가 복수의 의원실을 통해 농·축협으로부터 받은 ‘2016~2020년 농·축협 외상매출금 한도 초과 관련 지적 및 징계 현황’을 분석한 결과, 최근 5년간 감사에 적발된 사례는 321건에 달했다. 그러나 징계로 이어진 것은 16건에 불과했다.

징계 종류(파면·해임·강등·정직·감봉·견책)별로는 징계를 받은 직원 118명 중 99.2%인 117명이 ‘경징계‘ 처분에 그쳤다. 단순주의를 주는 정도인 ‘견책’이 41명, 그보다 낮은 수준의 징계인 ‘주의’가 60명이었다. 급여를 깎는 감봉은 16명이었다. 중징계 처분은 정직 1명에 불과했고 파면·해임은 한 명도 없었다.

외상거래 한도를 초과한 거래는 농림축산식품부의 농협중앙회 정기감사에서도 단골 지적대상이다. 감사에서 지적받은 기관이 재차 적발된 사례도 있다. 부경양돈농협의 경우 2014년 농림축산식품부 정기감사에서 기관경고와 시정조치를 받았지만 고쳐지지 않아 2016년 감사와 2018년 감사에서 또 외상매출금 한도를 초과한 물품 공급이 19건 적발됐다. 이때에도 거래를 담당했던 직원들은 ‘견책’ 이하의 경징계를 받았다.

이에 대해 농협 측은 “외상거래 문제는 사건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며 “또 감사에 적발되면 거래당사자가 외상대금을 갚는 경우가 많아 이럴 경우 징계까지 이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엄격한 징계·관리시스템 구축 필요

그러나 이 같은 솜방망이 징계가 문제를 반복하고 피해를 키운다는 지적이 나온다. 류두환 불법시민감시위원회 위원장은 “매년 똑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엄격한 징계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며 “‘삼진아웃제’와 같이 처벌규정을 보다 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불법시민감시위원회 측은 2010년 수협 비위를 대표적 예로 들었다. 수협의 경우 2010년 외상거래 한도를 초과한 거래를 허용한 지점장 등이 업무상 배임 혐의로 무더기 실형을 선고받은 뒤 외상거래 한도 초과한 거래가 급감했다.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수협에서 한도를 초과한 외상거래로 감사에 적발된 사례는 4건에 불과했다.

류 위원장은 “외상한도거래 약정금액과 기간을 전산시스템에 설정하고, 초과 거래를 하면 전산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강력한 제어조치가 필요하다”며 “자정능력을 이미 상실했다면 외부기관을 적극 활용하는 등 정부차원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사진=이보람 기자 bora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