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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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칼럼] 국정원장의 가벼운 처신

전임 정부 원장 6명 구속 기소
정권안보 위해 정보기관 악용
박지원 ‘제보 사주’ 의혹 논란
야권 대선주자 공격 부적절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활력과 명예를 회복시킨 남자.’ 메이어 다간 전 모사드 국장(2002.8~2011.1)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모사드의 위상과 이미지 제고에 그가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 보여준다. 최대 업적은 적대국인 이란·시리아의 핵개발 저지다. 2007년 시리아 데이르에즈조로 핵 시설 폭격과 이란 핵 과학자 아르데시르 호세인푸르 암살이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대표적인 모사드 작전이다.

다간은 역대 최고의 모사드 국장으로 평가된다. 국가안보 공헌도가 큰 데다 정보기관장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실천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이 정치인의 도구가 되면 나라가 위험에 빠진다’는 소신이 확고했던 그는 정치 개입을 극도로 경계했다. 아리엘 샤론 등 3명의 총리 정부에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다간의 행보는 흑역사로 점철된 한국의 국가정보원장들과 대비된다.

김환기 논설위원

안타깝게도 국정원에는 다간처럼 여러 정권에서 중용된 사례가 전무하다. 검찰 수사의 ‘험한 꼴’을 당하지 않은 이가 드물다. 전임 정부들의 국정원장 12명 중 10명이 퇴임 이후 검찰 수사를 받고 6명이 구속기소된 것은 기네스북 등재감이다. 임동원·신건은 불법 감청, 원세훈은 댓글 공작, 남재준·이병기·이병호는 청와대에 특수활동비를 제공한 혐의가 확인됐다. 하나같이 정권 안보를 위해 국정원을 악용했다.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불법행위다. 국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문재인정부의 서훈 전 원장과 박지원 원장은 전임자들이 써온 흑역사의 전통을 깰 수 있을까. 박 원장이 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 ‘고발사주 의혹’ 사건의 ‘제보 사주설’로 시험대에 서 궁금증을 더한다. “9월 2일이라는 날짜는 우리 원장님이나 제가 원했거나 배려받아서 상의한 날짜가 아니다”라는 제보자 조성은씨의 언급은 합리적 의심의 단초를 제공했다. 만일 제보자에게 ‘고발사주 의혹’의 폭로 방법과 시점을 코치했다면 국기 문란 행위에 해당된다.

더욱이 박 원장은 윤 전 총장 측의 의혹 제기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도를 넘었다. “나가면 나한테 다 죽는다”, “내가 다 알고 있으니 편하려면 가만히 계시라고 전하라”고 한 것은 야권 대선주자 ‘겁박’으로 비칠 수 있는 부적절한 처신이다. 정치개입 논란을 자초한 실언이다. 국정원장은 외부 노출을 최대한 피하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걸 잊었단 말인가. 억울한 점이 있더라도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 원장은 SNS에 미국 워싱턴과 뉴욕을 오간 사실을 노출하고 사기행각을 벌인 가짜 수산업자에게 선물까지 받은 일이 알려져 구설에 오르지 않았나.

애초에 문재인 대통령이 말이 많은 ‘정치 9단’을 국정원장에 앉힌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문 대통령은 자신과 국정원장이 전임자들처럼 불행한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박 원장을 발탁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 원장의 대북 비밀협상 경험을 활용할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 원장은 취임 1년여 만에 국정원의 최대 리스크로 떠오른 게 현실이다.

박 원장과 국정원은 국가안보와 국익의 파수꾼이라는 본분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다. 충북동지회 간첩단을 검거한 것에 국민이 박수를 보낸 이유다. 국가정보학 이론서 ‘분단국의 국가정보’(최준택·이영무 등 공저)는 정보기관이 정권 수호의 ‘충견’이 되지 않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최고 권력자가 정보기관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사용하지 않겠다는 가치관이 확립돼 있어야 하고, 정보기관 수장은 최고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제공해선 안 되며, 정보기관은 국가안보와 국익만을 고려해 정보의 가치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간 국장과 모사드를 떠올리게 된다. 박 원장이 이 책을 정독하고 정보기관장 직책의 무거움을 되새기길 기대한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신중한 언행이 요구되는 자리가 아닌가. 다간이 퇴임할 때 이스라엘 장관들은 이례적으로 기립박수를 했다. 우리나라에선 언제나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하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