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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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칼럼] 명함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법

소위 잘나가다 은퇴한 사람들
바뀐 환경 적응못해 힘들어해
늦가을 외롭다고 싱숭생숭 말고
‘인생 2모작' 멋진 꿈 꾸어보길

친구 한 명이 최근 크게 삐쳤다. 짐작이 가지 않아서 다들 의아해한다. 결국 한 친구가 나서 나름 분석했다. 명함 문제라는 것이다. 친구는 갑 중의 갑이라는 금융권 공공기관에서 고위급 간부로 은퇴했다. 갑으로 평생 지낸 것이다. 문제는 막상 은퇴해보니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알아서 모시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이 같은 환경에 스스로 적응이 되지 않아 삐친 것이라는 분석이다. 내가 아는 한 예비역 삼성장군도 구들목 장군이다. 어디 나가길 꺼린다. 나가봐야 수만명을 지휘했던 군단장으로 대접받기 어렵다. 그래서 집콕이다. 운전도 서툴다. 야전에서 근무하던 영관장교 시절부터 군 지프를 타고 다닌 탓에 장롱면허다. 어디 갈 때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태워줄 것을 부탁해 온다.

모두가 잘나가던 사람들의 문제다. 대기업 임원, 고위공무원, 장성 등이 예가 된다. 자신의 존재 또는 위치가 바뀐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힘들게 된다. 자신도 힘들고 주위 사람도 힘들게 한다. 스스로 바뀌어야 하는데 잘 안 된다. 결국 상처를 입고 타의에 의해 바뀌게 되는데, 세상에 이것처럼 괴로운 게 없다. 그래서 이것저것 불만이 많다. 버럭 화부터 곧잘 낸다. 자신의 처지가 뭣 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한국 남자는 은퇴하게 되면 잠수타는 경우가 많다. 이것저것 온갖 신변잡기를 페북이나 단톡에 올리며 지낸다. 정반대의 사람도 있다. 영양가 없는 직함을 잔뜩 새긴 명함을 내밀며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역시 보기 안쓰럽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매체경영학

정년이 제법 긴 직업도 이 땅에서는 대부분 육십이 고비다. 누구도 은퇴를 비켜 갈 수 없다. 문제는 예전에는 정년을 하고 얼마 있다 죽었지만 요즘은 80, 90까지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함 없는 인생에 힘들어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도는 주저한다. 뭘 시도했다가 퇴직금, 살던 집까지 날렸다는 소문이 흉흉하다. 많지 않은 돈, 시도해 볼 용기도, 힘도 없다. 그저 페북이나 단톡방에 정치 얘기만 잔뜩 늘어놓는다. 온갖 떠도는 뻔한 얘기를 짜깁기해 올려 놓고 ‘좋아요’와 댓글이 많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손바닥만 한 휴대전화에 하루 종일 머리 처박고 사는 게 은퇴한 한국 남자들의 모습이다.

실제로 한국 사람은 쉽게 조로(早老)하는 경향이 있다. 속도감이 오늘날 한국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도가 지나치다. 오 분이면 국밥 한 그릇 뚝딱이다. 사탕 하나를 끝까지 빨아 먹는 한국인은 드물다. 몇번 빨아 보다가 이내 우두둑 부숴 먹어야 성이 찬다. 천천히 끝장을 보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보자. 큰맘 먹고 산 책도 앞부분에는 손때가 새까맣지만 뒤로 가면 말짱하다. 헌 서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이란 앞만 약간의 사용 흔적이 있을 뿐 뒤로 갈수록 깨끗한, 새책 같은 헌책이다. 이렇게 급한 한국인의 성정은 압축성장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남겼다. 노익장이 많지 않다. 은퇴하면 쉬이 조로(朝露: 인생의 덧없음)를 받아들인다. 괴테는 여든 살에 파우스트를 발표했고, 피카소나 카잘스도 칠순이 넘어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은퇴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다. 인생 2모작에 올인하는 경우는 드물다.

늦가을, 외롭다고, 인생이 덧없다고, 우울해하는 사람은 이효석 선생의 ‘낙엽을 태우면서’를 다시 꺼내 읽어야 한다. 고등 때 국어선생님에게 귀싸대기 맞아가면서 달달 외웠던 글이다. 글은 센티멘털리즘을 경계하며, 가을이야말로 삶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절기임을 강조한다. 결국 내린 결론이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고 의미도 있다. 그래도 보통 사람은 거리의 낙엽을 보면 싱숭생숭해진다. 그래서 누구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라는 R 구르몽의 ‘낙엽’이란 시를 생각해 내고, 또 어떤 사람은 이브 몽탕의 샹송 ‘고엽’을 듣게 된다. 이처럼 가을에 대해서는 저마다 느낌이 있고 모두가 할 말이 많다. 페북, 단톡에는 단풍사진이 넘친다. “이 가을을 어찌할꼬”라고 탄식하는 친구도 있다. 누구는 ‘가을이 글썽거리며 떠나고 있다’고 올렸다. 이효석 선생이 그랬다. 그래도 슬퍼하면 안 된다고. 그래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산다. 가을이 가야 겨울이 오고 또 기다리던 봄도 온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매체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