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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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철도차량 최저가 낙찰제 없애야

저가 수주에 기술·안전은 뒷전… 종합심사로 바뀌어야

탄소중립시대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철도가 주목받고 있다. 세계 네 번째 고속철도 개통 국가인 한국에서 철도에 대한 관심은 유독 더 크다. 이런 나라에 철도산업 경쟁력을 저해하는 ‘덫’이 존재한다는 걸 최근 알았다. 최저가 낙찰제도다.

우리가 매일 타는 지하철이 이 제도 때문에 첨단 기술력이나 안전성은 뒷전이고 가격이 얼마나 싸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2015년부터 올해까지 낙찰된 전동차 칸당 평균 가격은 9억7000만원. 같은 기간 국내 유일 철도차량 수출회사 A사가 수출한 칸당 단가 17억2000만원의 56%에 불과하다. 얼마나 싼 부품을 썼기에 저 가격에 가능했는지 궁금해진다.

나기천 산업부 차장대우

최저가 낙찰제는 ‘저가 수주→수익성 악화→연구개발(R&D) 투자 위축에 따른 경쟁력 악화→수익성 악화’라는 악순환의 고리로 연결된다. 실제 지난해 국내 철도차량 제조업계의 R&D 비용은 2019년 대비 23% 이상 급감했다. 미래 성장 엔진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최저가 입찰제는 철도를 이용하는 국민 불편도 초래한다. 저가 부품 사용에 따른 잦은 유지보수로 혈세가 낭비된다. 생산능력 고려 없이 저가로만 사업을 따면 차량 납기가 지연되고 노후 차량 교체에 차질이 빚어진다. 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2015년 서울시가 사들인 2호선 신형 전동차가 최저가 낙찰제의 대표적인 문제 사례로 업계에서 회자한다. 해당 전동차에선 50여건의 품질안전 이슈가 보고됐다.

최근 전문가들 사이에서 철도차량에도 종합심사평가낙찰제가 적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건 다행이다.

종합심사평가낙찰제는 가격뿐만 아니라 업체의 생산능력, 기술력, 안전성, 수행실적 등을 고루 고려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철도 선진국이 채택 중이다.

네덜란드는 입찰 참여업체들의 자격심사를 통해 입찰참여 여부를 결정한 뒤, 또다시 세부 기술평가를 진행해 이를 통과한 업체의 최종가격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낙찰자를 선정한다. 미국은 가격 30%·기술 70%로, 대만은 가격 20%·기술 80%로 업체의 종합적인 능력을 평가한다.

국내에서는 300억원 이상의 대형 공사나 건설, 용역사업에만 종합심사평가낙찰제를 의무 적용한다. 철도차량은 국가계약법상 공사나 건설, 용역이 아닌 ‘물품’으로 취급되기에 이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다.

방위산업의 경우는 입찰 때 기술, 인력, 생산설비와 협력사와의 업무협약(MOU) 여부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평가위원 5인이 1박2일간의 현장실사도 진행한다.

국내엔 A사를 포함해 3곳 정도의 철도차량 제작사가 있다. 이들이 가격 낮추기 ‘치킨게임’을 벌이는 틈을 중국 기업이 비집고 들어올까 걱정된다. 한국은 2012년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개정을 통해 철도차량 조달시장 문을 해외에 활짝 열었다. 중국은 최근 각각 세계 최대 규모인 2개의 철도차량 제조사를 1개로 합쳐 ‘파이’를 더 키우고 가격 경쟁력을 높였다. GPA와 최저가 입찰제 덕에 이 회사는 언제라도 한국 시장을 점령할 수 있다. 서울 지하철에 ‘메이드 인 차이나’ 전동차가 달릴지도 모른다. 어설픈 제도 탓에 ‘철도 주권 상실’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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