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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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최종후보 『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약한 것들이 이기게 돼 있어”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부지배인 동지, 고향이 어디십니까.” 평양백화점의 여성 총지배인과 인사를 나눈 뒤 백화점 안내를 맡은 부지배인과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부지배인이 옛날식 서울말과 억양을 쓰는 게 아닌가. 북한 당국의 안내로 백화점을 방문한 소설가 황석영은 부지배인에게 물었다.

 

“서울입니다.” 부지배인 노인은 대답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서울 어디입니까.” 그는 다시 물었다. “영등포입니다.” 영등포는 1947년 가족이 평양을 떠나서 월남해 정착한 곳이었고, 그 자신이 고등학교 시기까지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는 이날 노인과 함께 백화점 안을 거닐면서 진열된 상품을 보기보다는 옛날 영등포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황석영 작가.

며칠 후, 황석영은 초대소의 보장성원들에게 간청해 대동강변 수산시장에서 동향의 부지배인 노인을 다시 만나 소주를 털어 넣으며 노인과 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등포 철도공작창에 다녔던 아버지, 철도학교에 들어가 기관사가 된 뒤 만주를 넘나들다가 해방 이후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활동을 하다가 미군정의 압박을 받고 월북한 그, 전쟁이 터지자 단기속성 과정을 마치고 기관사가 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하여 낙동강 전선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아들. 특히 만주로 가는 급행열차의 기관사로서 대륙을 넘나들던 그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만주의 검은 들판 위로 떨어지던 세숫대야만 한 붉은 해, 바람에 출렁이는 수수밭의 바다, 온통 빡빡하게 하늘을 메우면서 대륙에 쏟아지던 어린애 머리만큼 커다란 눈송이, 조선의 아름다운 산과 강과 골짜기며 들판에 서 있던 아름다운 간이역⋯.

 

방북한 소설가 황석영은 1989년 노인의 철도원 3대 이야기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서사라고 생각하고 언젠가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작정만 하고 쓰려다가 그만두고 다음으로 미루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몇 해 전, 그는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쓰겠다고, 이것을 쓰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트렁크 2개를 들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1년간 자료 조사하고 준비한 뒤 다시 1년 이상 집필을 이어간 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창비)를 펴낼 수 있었다.

 

“여러 다른 얘기, 소설을 쓰고 그러다가 지금만큼 돼서 소설을 쓰게 된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굴리기만 하고 30년 동안 질질 끌어온 거지요. 사실은 30년 동안 그것 한 가지만을 연구한 것도 아니고요.”

『철도원 삼대』는 최근 영국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 소라 김 러셀, 영재 조세핀 배 역시 황 작가와 함께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의 최종 후보가 됐다. 부커상 심사위원단은 작품에 대해서 “한 세기의 한국사를 엮은 서사적 이야기”라며 “일제 강점기로부터 시작해 해방을 거쳐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보통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서구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한국에 대한 광범위하고 종합적인 책으로, 한 나라의 역사적 서사와 정의에 대한 개인의 추구가 섞여 있다”고 평했다.

 

“이진오는 잠자리에서 되도록 먼 곳인 원형 통로의 반대편 구석에 용변 장소를 정해두었다. 처음에는 난간을 잡고 시도해 보았지만,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려면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쏠리거나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발가락들은 운동화 안에서 독수리의 발처럼 잔뜩 오그리고 있을 것이다. 겨냥을 잘해야 할 텐데.”(7쪽)

 

소설은 45m 높이의 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 중인 이진오가 죽그릇에 용변을 배설하려고 시도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고공 농성을 이어가면서 현실 세계의 부조리를 조명하는 한편, 페트병에 사람들의 이름을 써서 대화하는 방식으로 증조부 이백만―조부 이일철―부친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노동자 삼대와 그 가족의 삶을 회고하는 진오의 시선을 따라서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나아간다.

 

강화도 출신의 영특한 증조부 이백만은 열세 살 때부터 요시다정미소의 보조 일꾼을 시작으로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철도국 직원이 돼 영등포 공작창에 자리를 잡는다. 기차에 매혹된 백만은 두 아들 이름을 한쇠(일철), 두쇠(이철)로 짓는다. 일철은 철도종사원양성소를 거쳐 기관사가 돼 만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대륙을 넘나들지만, 동생 이철은 철도 공작창에 다니다가 파업에 연루돼 해고된 뒤 노동운동에 매진한다.

 

“‘나두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문은 다 들어서 알구 있다. 조선 전국에서 쟁의질하구 동맹파업하구 난리라는데, 그러면 우리나라가 독립할 거 같냐? 일본 놈들이 처먹은 이 나라를 만만하게 내줄 거 같냐구. 너희들 사회주의 놀음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우리나라가 독립해야 된다는 걸 모르는 조선 사람이 어딨냐? 우선 이 세월을 견디구 살아남아야지. 나는 그래두 운이 좋아 직장을 얻어 오늘날까지 먹구 살아왔지.’ ‘아부지가 운이 좋긴 뭐가 좋아요? 아부지한테는 왜놈들이 상전이구 주인이잖아요? 제 말씀은요, 일본 놈이든 조선 놈이든 그냥 목숨만 부지할 정도루 주는 대루 먹구사는 종놈이 아니라, 일한 만큼 대우를 받으며 살자는 거예요. 그런 사회가 오면 나라도 독립이 되겠지요.’”(130쪽)

 

하지만 체포된 이철은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고, 일철은 해방 이후 전평 활동을 하다가 미군정의 압박을 받자 월북한다. 아버지와 함께 월북했던 지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철도 기관사가 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가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된 뒤 석방돼 영등포 집으로 돌아온다.

 

특히 이철을 매개로 일제 강점기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이재유를 등장시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중의 벽에 맞섰던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이백만의 부인인 주안댁과 여동생 막음, 일철의 부인인 신금이와 이철의 아내 한여옥, 지산의 아내 윤복례 등으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가 더해지면서 리얼리즘을 훌쩍 뛰어넘는다. 특히 홍수가 진 영등포 일대에서 초인적 힘과 지혜로 사람과 물건을 구한 주안댁, 출중한 입담을 자랑하는 막음, 영혼을 볼 수 있는 신통력과 예지력의 신금이 등은 민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한다. ‘세상일은 자꾸 되풀이된다는데. 그건 뭐 세상이나 사람이 달라지구 풍속두 달라졌는데두 그렇다는구나. 아마 사람 사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겉만 달라졌지 내용은 같다는 얘기겠지.’⋯ ‘너 굴뚝 위에 혼자 있는 거 같지?’ ‘할머니하고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그녀는 손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저어기 하늘에 별들 좀 보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이 다들 살다가 떠났지만 너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느니.’”(213쪽)

 

회사와 협상이 이뤄지면서 진오는 410일 만에 굴뚝에서 내려오지만, 복직을 약속했던 회사는 그와 동료들의 뒤통수를 친다. 결국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진오와 김형, 막내 차군은 헤어지기 전에 소주를 나눠 마신다.

 

“마지막 남은 세 사람은 서로의 눈길을 피하며 소주잔만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형이 진오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올라가자. 이번엔 내가 올라가겠어.’ 막내 차군도 말했다. ‘저두요. 김선배, 저두 올라가겠어요.’ 거기서 대화가 끊기고 더 이상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612쪽)

 

거장 황석영은 왜 『철도원 삼대』를 써야 했을까. 그가 형상화한 한국 근현대 백년에 걸친 노동자의 삶과 죽음, 꿈과 눈물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황 작가를 전화 통화는 물론, 2020년 6월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와 2020년 12월 인천문화재단 북콘서트 등을 통해서 만났다.

―영등포를 중심으로 장소성도 강력하다.

 

“영등포라는 도시는 원래 인천 때문에 생겨난 곳이다. 이전에는 세곡선이나 삼남에서 오는 배들이 강화와 한강을 거슬러 마포로 들어왔는데, 식민지 근대화가 되면서 제물포가 인천이 되면서 항만이 생기고 경인철도가 생기면서 영등포가 형성됐다. 인천에 있던 노동자가 영등포에 와서 일하고 영등포 노동자들이 인천에 가서 일하면서 한 통속이 돼갔다. 영등포와 인천은 사람이나 물류가 옆 동네나 마찬가지였다. 경부선과 경인철도가 만나는 지점이 영등포다. 저는 근대 도시의 자식이다. 어릴 때 영등포역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나 기관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영등포나 인천, 도쿄 변두리 같은 개화나 근대의 모습을 보면 향수를 느낀다. 1980년대 도쿄 외곽의 니시고야마라는 작은 도시를 갔는데, 빨간 우체통과 옛날 일본과자인 화과자 가게, 술집 앞에 휘장 등 옛날 영등포가 그대로 있더라. 농촌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벼를 심고 모를 내고 쌀을 수확하고 과정을 전혀 몰라서 자료를 구하고, 공부하고, 현장 답사하고 일부러 겪어서 쓴 게 『장길산』이었다. 『장길산』은 전통적 농촌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인천도 구체적이더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한테 야단맞고 속상해 큰누나의 용돈을 들고튄 곳이 인천이다. 영등포역에서 인천 가는 기차를 타고 내려와서 바다를 처음 봤다. 다음날 부두가의 생선시장 좌판을 하시는 주안댁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주안댁은 이후 어머니와 언니 동생하며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고등학교 때도 인천이나 송도, 김포 등지를 자주 왕래했다. 소설 『심청』을 쓰면서 인천에 대한 자료를 많이 받아 공부하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동네 아주머니나 동창들과 모이면 김밥을 싸들고 월미도로 원족을 갔다.”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는 이와 관련, “최만식의 장편소설 『탁류』로 전북 군산이, 김동한의 소설 「국경의 밤」으로 두만강 일대가, 이문구의 연작소설 『관촌수필』로 충청도의 작은 마을이 각각 한국 근현대문학 지도에 편입됐다”며 “이번에 『철도원 삼대』로 그 동안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았던 영등포가 새롭게 한국 현대문학의 중요 장소로 들어왔다”고 평했다.

 

―중심인물 일철과 이철 형제의 행로가 엇갈리는데.

 

“형 일철은 집안을 감당해야 되겠다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도 있었고 공부도 잘했다. 이철은 형처럼 공부에 열중하지 않다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며 자각한 뒤 노동운동에 나선다. 형은 어려운 길을 가는 아우에게 미안해 하면서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 1970~80년대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이다.”

 

―엄청난 생활력을 보여주는 주안댁, 입담 좋은 막음, 혼을 볼 수 있는 신통한 신금이, 만주로 무장투쟁을 떠나는 한여옥 등 여자들도 많이 나온다.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도 전면에 나서 활동한 여성들이 꽤 많았는데, 거의 조명이 되지 못했다. 어느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로 당시 여성들을 조명했는데, 반성과 함께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런 아쉬움이 이번 소설에 반영된 것 같다. 많은 역사를 겪으면서 여성들이 했던 역할이 많이 빠져 있다. 여성의 집안일을 당연한 일이라는 식으로 넘어간 게 많다. 하지만 여성들이 겪은 일들은 대단하다. 제 어머니만 해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40세에 과부가 돼 개가는커녕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4남매를 모두 대학 보냈다. 여성 등장인물은 대개 모델이 있다. 가령, 주안댁은 제가 초등학교 때 인천으로 가출했다가 만난 생선 장사주안 이모의 캐릭터를 빌려다가 썼다. 막음이 고모의 경우 털털하고 입담 좋은 아주머니가 어른거리고, 신금이는 신여성이던 어머니 면모가 들어있기도 하다.”

 

―특히 영혼을 보는 신금이 할머니의 모습은 인상적인데.

 

“신금이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이씨 집 기둥이고, 손자 진오에게 과거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 신금이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재미있게 생각한 인물은 앞잡이부터 시작해 경찰서장까지 출세하는 야마시타 최달영이다. 악역이지만 굉장히 잘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작가 황석영에게 이번 작품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는 죽는 날까지 글을 쓰겠다, 현역 작가로 죽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전 『수인』을 쓰고 났더니 뭔가 다 끝난 것 같더라. 제가 1962년 『사상계』 신인상을 받았으니 등단 60년이 지났고, 여든이 넘었다. 청년 작가였는데, 뒷간에 잠깐 갔다 오니까 어느 새 인생이 휘딱 다 지나가 버렸다. 원로 작가라는 하나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원로 작가는 자신이 여태까지 쌓아올린 업적, 그것을 반복하는 매너리즘을 벗어나야 하는 책무가 있다. 말하자면, 원로 작가라는 건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과 똑같은데, 더 이상 나갈 데가 없지만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저를 한 걸음 더 내딛게 한 작품이 바로 『철도원 삼대』였다.”

 

―작품은 염상섭의 『삼대』와 대비되기도 하는데.

 

“3.1운동을 거치면서 국내 대중 운동이 조직되고 국외에서 무장투쟁이 벌어지며 사회주의 사상이 도입되면서 1920년대에 들어서 한반도 조선에 근대적 자의식이 형성되는데, 한국문학에서도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나 중편 『만세전』에 와서야 인물들이 비로소 근대적 자아, 식민지 백성의 자의식을 갖게 된다. 염상섭의 『삼대』가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식민지 자본주의 근대를 조명한 소설이라면, 저의 『철도원 삼대』는 철도 노동자를 중심으로 3.1운동 이후부터 식민지 자본주의, 한국전쟁과 분단을 거쳐서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염상섭의 『삼대』가 한국 근대소설의 입구라면, 『철도원 삼대』는 그 출구라고 할 수 있다.”

 

최 교수는 이와 관련, “염상섭의 『삼대』가 한반도의 근대 입구라면,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는 근대의 출구를 조명하면서 『삼대』를 이으면서도 아울러 넘어서는 중요한 결절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염상섭의 『삼대』는 부의 축적과 가문의 번영을 중시하는 구한말 대지주 조의관과,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음에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현실과 타협하며 타락하는 그의 장남 조상훈, 조부와 부친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려 하지만 결국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손자 조덕기로 이어지는 삼대의 삶과 몰락을 그린 작품이다.

 

기존 노동소설과도 결이 다르다. 황해도 용연의 농민이 인천에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를 그린 강경애의 장편소설 『인간 문제』, 수색역의 전보통신 노조 이야기를 다룬 곽학송의 『철로』, 일용 노동자들의 이야기인 황 작가의 중편 『객지』, 인천의 노동자들을 아름답게 그린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쏘공』과 달리 근현대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최 교수는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는 기존 강경애의 『인간 문제』와 곽학송의 『철로』,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소공』과 작가 자신의 중편 「객지」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작품”이라며 “비로소 한국 노동자들이 첫 주인공으로 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요컨대, 소설은 요즘 우리가 깔고 앉아있는 삶이나 현대의 근거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영등포를 배경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빠진 근현대 산업노동자를 전면으로 내세워 그들의 백여 년에 걸친 삶과 눈물, 꿈과 좌절의 여정을 재조명하는 한편, 역사적 사실보다는 개인의 일상적 일화들로 민담적 세계를 그려보려고 했다고, 「작가의 말」에서 고백했다.

 

“나는 우리 문학사에서 빠진 산업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근현대 백여 년에 걸친 삶의 노정을 거쳐 현대 한국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드러내보고자 하였다. 또한 이것은 이지러지고 뒤틀리고 하면서도 풍우의 세월을 견뎌온 한국문학이라는 탑의 한 부분에 돌 하나를 끼워 넣는 작업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616쪽)

 

“내가 눈이 나빠졌는가 보다, 이거 좀 읽어줄래?” 밤이 돼 누나들이 제 방으로 돌아가자, 어머니는 황석영을 조용히 안방으로 불렀다. 어머니는 잡지 『사상계』에 실린 아들의 단편소설 「입석 부근」을 내밀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그때 처음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가 책의 세계로 들어온 것은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운 뒤부터였다. 이후 늘 책과 가까이 있었다. 처음 어머니가 사다준 『걸리버 여행기』, 『소공자』, 『보물섬』 등을 재미있게 읽었고, 한국전쟁 피난 시절에도 어머니가 사다준 『방정환의 소년소설집』, 『톰 소여의 모험』,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을 읽었으며, 다시 영등포로 돌아와선 책 노점상을 통해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부활』 등을 큰누나와 돌려가며 읽었다. 누나를 졸라서 신간 어린이 잡지를 읽기도 했다.

 

그가 아버지가 작고한 초등 시절부터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누나와 그에게 책을 사주면서 책과 친한 사람으로 자라길 희망했다. 그는 공부보다 책읽기나 다른 것에 정신이 파는 일이 많았다. 혼자서 책을 읽는 시간이 오붓하고 좋았고,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다가 오가는 식구들의 참견을 피하기 위해서 군용 손전등을 가지고 비좁은 다락에 올라가서 쪼그리고 책을 읽기도 했다.

 

1956년 명문 경복중학교에 입학한 뒤 ‘변두리적 자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새 친구들은 대체로 집도 부유하고 공부도 잘하고 똘망똘망한 녀석들이었다. 첫 학기가 지나고 성적을 보니 어느 새 중간쯤의 보이지도 않는 평범한 녀석들 틈에 묻혀버렸다. 재담꾼이 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아이들을 웃기기 시작했고 재미있는 익살을 만들어내려고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기도 했다.

 

“재담꾼으로 알려진 내가 사실은 수줍고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이 알 도리가 없듯이 말이다. 재담은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미리 선수를 친다고나 할까. 먼저 이쪽에서 떠들썩하면 대개 상대방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놓치기 마련이므로.”(41쪽)

 

이때 그는 문방구에서 두툼한 일기장을 산 뒤 일기는 쓰지 않고 짤막하게 단상을 적거나 시를 썼다. 책읽기, 특히 소설을 좋아했지만, 학교의 특별활동 시간에는 문예반이 아니라 수영수구반에 들어갔다. 고교 시절에도 문예반이 아닌 등산반에 들었고.

 

“왠지 아끼는 것일수록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가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달이나 꽃을 보며 원고지 잡고 펜을 들어 포즈를 취하는 것 같은 문예반은 목덜미가 근질거려서 도저히 근처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질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글쓰기와 사는 일이 일치되었으면 하는 열망으로 발전했다.”(『수인』, 제2권, 10쪽)

 

고교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59년 명문 경복고에 입학한 뒤 어머니가 땅을 장만해 방이 다섯 개나 되는 새집을 지으면서 이사를 했다. 그는 처음으로 혼자만의 방을 쓰게 됐고, 이때 책을 많이 읽었다. 주로 19, 20세기 근현대 서구 고전 소설들을 다시 찾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볼펜으로 대학노트에 소설의 형태를 갖춰 글을 썼다. 보통 학교에 갈 걱정에 날이 환하게 밝아오면 일단 잠을 잤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져 꼬박 날을 새기도 했다. 등교해 오전 내내 졸다가 깨다가를 되풀이했다. 어머니는 뒤늦게 눈치를 채고 한밤중에 그의 방에 들이닥쳐 노트를 불태우기도 했다. 단편소설과 단상들을 계속 노트에 써갔다.

 

그는 교과서는 빼놓고 읽을 책들만 가방에 넣어서 등교하고 수업 시간에 책상 밑에 책을 펼쳐놓고 읽었다. 학년말 성적은 엉망이었지만, 집에서 일하다가 떠난 누나 이야기를 그린 단편소설 「팔자령」로 청소년 문예지 『학원』의 학원문학상에 당선됐다. 그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게 됐다.

 

이듬해 4·19 혁명에 함께 참여한 고교 동창 안종길이 경찰의 총탄에 사망했다. 그는 슬픔 속에 친구들과 함께 유고시집 『봄, 밤, 별』을 발간했다. 여름방학이 되자 친구와 충청도와 전라도, 제주, 경상도를 도는 무전여행을 다녀왔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이제 다시는 소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규율과 점수로 통제되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수인』, 제2권, 37쪽)

 

학교를 자주 결석했던 그는 2학년을 마칠 즈음 담임으로부터 낙제 통고를 받았다. 1961년 작은 잘못으로 소년원에 갔다가 석방돼 집으로 돌아오는 동네 형 이야기를 그린 「출옥하는 날」이 전국고교문예 현상공모에 당선됐다. 1962년 봄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남도를 방랑하다가 10월에야 귀가했고, 11월 단편소설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마침내 늘 자신을 위해서 분투하고 자신 때문에 가슴 졸였던 어머니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소설가 황석영의 원점이었다.

 

“나는 모처럼 어머니와 마주앉아 「입석 부근」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스스로 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치를 보니 열심히 듣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낭독을 끝내고 나니 제법 밤이 깊었다. 어머니가 연탄불 뚜껑 위에 얹어두었던 군고구마를 가져왔고 둘이서 입김을 후후 불면서 먹었다.”(『수인』, 제2권, 63쪽)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서 서울 영등포에서 자란 황석영은 1962년 단편 소설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고 1970년 단편소설 「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객지』, 『가객』, 『삼포 가는 길』, 『한씨 연대기』, 『무기의 그늘』, 『장길산』(대하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을 발표했다. 『오래된 정원』, 『객지』, 『손님』, 『무기의 그늘』 등 많은 작품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세계 각지에서 번역 출간됐고, 만해문학상, 단재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가 황석영은 시대와 문학 사이를 분주히 왕래했고 ‘시대의 수인’과 ‘문학의 수인’ 사이에서 자주 흔들렸다. 남도 공사판을 전전했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으며, 1970년대엔 땅끝 해남으로 내려가 문화운동의 춤판을 벌였다. 문학에선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의 삶을 핍진하게 그리며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격찬을 받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했고, 급기야 1989년 금단의 땅 북한에 들어갔다가 망명과 5년 복역이라는 형극의 길을 걸었다. 시대의 격류에 휩쓸린 그는 1984년 대하소설 『장길산』 연재 이후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다가 1998년 석방된 뒤부터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왜 대하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온 것인가.

 

“글쎄, 지금 후회되는 바가 있다. 청년 작가 시절 ‘지향하는 문학과 개인적인 삶이 일치했으면 좋겠다,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작가들의 경우 문학과 삶이 상당히 떨어져 있고, 떨어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작가는 (문학과 삶이) 같이 어울려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력한 건 아닌데, 살다보니 삶도 소설처럼 같이 갔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인 삶은 뒤죽박죽, 우여곡절이 돼버린 것이다. 지금 와서 후회하진 않는다. 어차피 지나고 보고 문학과 작품은 남는 것이니까.”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았겠느냐고 가정을 전제로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는 가정 자체가 우스갯소리이지만, 농담에 부응해 애기를 하자면, 다시 태어나면 딴 것 할 거야. 작가, 그거 다시는 안 해. 제일 재미없는 거야.” 스스로 대답이 재미있었는지 그도 웃었다.

 

―이른바 ‘민담 리얼리즘’론을 제창하고 있는데.

 

“20세기 초반 독일의 어떤 평론가는 소설의 위기라고 말했다. 이야기꾼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연희 형식에서 벗어나서 외로운 개인이 혼자서 쓰고 혼자서 고독하게 읽는 소통의 관계가 형성되면서 소설의 위기가 왔다고 분석했다. 저는 재미있는 민담을 하듯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다. 대하소설 『장길산』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민담의 틀을 갖고 있다. 이번 소설을 읽으면, 뭔가 옛날 얘기를 듣는 듯한, 할머니 무릎 팍을 베고 또는 사랑방에 앉아서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장편 『손님』의 경우 딱 짜놓은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있었지만, 이번 작품에선 생활 속에서 녹여서 옆 동네에서 일어난 일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것 같더라. 역사 이전에 민담 양식이 중요한데, 자기가 겪은 일에 살도 붙이고 잘난 척도 하고 장광설을 펴는 게 민담의 세계이다. 여기에 정확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역사가 된다.”

 

―앞으로 계획은.

 

“현재의 건강 상태로 따져보면 90까지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부지런히 써서 세 권 정도 더 쓰면 생각하고 있는 어떤 만년의 소설 양식을 보여주면서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이름을 ‘민담 리얼리즘’이라고 규정해 본다.”

 

몇 해 전 군산에 터 잡은 그는 해가 지고 달이 뜨면 비로소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늦은 밤부터 꼭두새벽까지 글을 쓰고 또 쓴다. 마치 밤 도깨비처럼. 내일의 태양이 뜨면 그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다시 분주한 하루를 맞을 것이다. “어딘지 건성인 것 같기도 하고 비켜서서 무심한 듯한 태도”로. 세상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낙관하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진오는 초등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 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 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564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