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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고개 넘기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입력 : 2025-06-22 14:24:28
수정 : 2025-06-22 14: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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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개봉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출전을 앞둔 한국 여자 핸드볼 국가 대표팀 선수들의 훈련 장면을 묘사한다. 남녀 주연 배우 엄태웅과 김정은의 산악 달리기 경주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그 배경이 된 장소는 서울 노원구 불암산의 일명 ‘깔딱고개’다. 오늘날 국가 대표 선수들의 합숙 훈련장으로 쓰이는 충북 진천선수촌이 생기기 전 옛 태릉선수촌이 바로 불암산 기슭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 노원구 불암산 기슭에 있는 옛 태릉선수촌 전경. 과거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출전을 앞둔 국가 대표팀 선수들은 이곳에서 매주 1회 불암산 깔딱고개를 단숨에 달려 올라가는 체력 단련에 참여해야 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 시절 선수들은 매주 1회 불암산 달리기로 체력 단련을 해야 했다. 코스의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깔딱고개는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미 땀에 젖고 숨이 막혀 물을 마시거나 어디 앉아서 쉬고 싶은 마음뿐인데 저 가파른 경사는 또 어떻게…. 왕년의 농구 스타이자 오늘날 여자 프로농구 우리은행 수석 코치로 일하는 전주원(52)은 2004년 언론에 “(국가 대표팀 선수 시절) 불암산 깔딱고개를 하루 10번이나 오른 적이 있다”고 밝혔다.

 

깔딱고개는 불암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숨이 깔딱거릴 정도로 힘들게 오르는 고개’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사실 우리나라 어지간한 산에는 ‘깔딱고개’라고 불리는 지형지물이 있다. 등산을 즐기는 민일영(70) 전 대법관은 임기 만료를 앞둔 2015년 8월 언론 인터뷰에서 “경기 양평 중원산의 깔딱고개를 넘어가면서 입에서 단내가 난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이른바 ‘꽃길’과 상반되는 ‘고생길’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널리 활용된다. 이명박정부 첫해인 2008년 7월 박재완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이 “한국은 선진국 진입의 깔딱고개 초입에 서 있다”며 “이대로 가면 한국은 선진국이 되지 못한다”고 경고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울산에서 열린 인공지능(AI) 글로벌 협력 기업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이 대통령 왼쪽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오른쪽은 김두겸 울산시장. 이날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고속 성장을 했는데 지금 시중에서 쓰는 말로 깔딱고개를 넘는 중”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제공

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울산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출범식을 찾아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고속 성장을 했는데 지금 시중에서 쓰는 말로 깔딱고개를 넘는 중”이라고 말했다. 자유 무역의 국제경제 질서 속에서 해외 수출로 큰 돈을 벌어들이던 꽃길은 거의 끝나 가고, 이제 낯선 고생길을 뚜벅뚜벅 걸어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날 이 대통령은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시작으로 ‘AI 시대 고속도로’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과감한 세제 혜택과 규제 혁신을 통해 대한민국 AI 대전환의 성공을 이끌겠다는 이 대통령의 포부가 5년 임기 안에 꼭 실현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