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베이스. 그 깊고 어두운 울림은 독보적인 개성과 특별한 카리스마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오페라 무대에선 왕이나 신, 때로는 철학자 또는 악마로 극장을 장악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처럼 전체 무대의 기둥이자 뿌리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특별한 베이스의 세계에서 연광철은 당대 최고로 손꼽힌다. ‘현존 최고 베이스’, ‘가장 위대한 베이스’ 등 수십년간 그의 이름 앞을 장식한 수식어 목록엔 최근 ‘오페라의 왕’이라는 찬사가 더해졌다.
그럼에도 “늘 2등의 자세로 살아왔다”는 연광철을 지난 11일 서울 남산 기슭에서 만났다. 1996년 바이로이트 축제 출연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한 후 30여년 동안 세계 주요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한 그는 어떤 상찬이 가장 감당하기 편한지 묻는 우문(愚問)에 이같이 답했다. “저는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음악가이고, 무대에서 먼지 마셔가며 조명 아래 의상 속에서 땀 흘리면서, 무대에서 제 역할을 다해낸 가수죠.”

그저 본업에 최선을 다할 뿐 자신이 요란하게 드러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지만 연광철이 세계 무대에 남긴 족적은 크고 뚜렷하다. 어둑한 시골 하굣길에 산고개를 두 개 넘어가면서 무서움을 이겨내려고 노래를 부르다 합창단에 들어갔다. 변성기 후 남들과 좀 다른 목소리를 갖게 됐다. 음악선생도 없는 공고에서 열린 교내 음악경연대회 1등상을 받은 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하다 고3 때 음대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에서도 성악 콩쿠르에서 입상을 거듭하며 유학을 결심했다. 1990년 단돈 700달러를 품고 불가리아로 떠났다가 다시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유학 갔다 오면) 적어도 청주에서는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유학길이었지만 갈고닦은 그의 재능이 빛났다.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가 자신의 이름을 건 콩쿠르에서 연광철을 직접 선발한 것. 그렇게 차세대 성악가가 됐다.
마침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 없는 자’란 독일 가곡을 곧 열리는 독주회에서 부를 예정인 연광철에게 고학생 시절 체험담을 물었다. “당시 불가리아는 학생에게 공산당이 설탕, 치즈, 계란을 받을 수 있는 쿠폰을 나눠주던 시절이었어요. 빵은 마음대로 살 수 있었는데, 하루 지나면 딱딱해져서 반으로 잘라 물에 끓여 고춧가루와 페퍼로니 가루를 넣어 먹었습니다. 그때는 비참하다기보다 ‘내가 과연 이걸 먹으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방세는 한 달 50달러, 생활비는 100달러로 감당할 수 있었는데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다달이 송금할 형편이 안 됐고, 처음에 들고 간 돈으로 버티다 나중에 한 번 인편으로 돈을 조금 받아 쓰며 고학 생활을 이어갔다. 연광철은 “베를린에 가서는 빨리 자립해야겠다 싶어서 취직하려 했는데 선생님(헤르베르트 브라우어 베를린 국립음대 교수)이 ‘작은 극장이나 합창단 가지 말고 나랑 공부를 좀 해보자’고 권유해 무료 레슨을 받으며 선생님 밑에 있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제가 청주에서 대학을 나와 음악선생이 되는 걸 바라셨죠. 그게 가장 안정적이고 자랑스러운 길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노래를 계속하겠다’ 하고, 상도 받고 다니니 ‘능력이 닿을 때까지 해보라’며 응원해 주셨습니다.”
독일 라이프치히·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활동하던 그는 1996년 새로운 도약 무대에 오른다. 베를린극장에서 연광철을 눈여겨본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 추천으로 199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극장에 데뷔한 것. 이후 세계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바이로이트에서만 15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2018년 독일 베를린 국립극장에서 최고의 영예인 ‘카머쟁어’(궁정가수) 칭호를 받는다.

그렇게 ‘바이로이트가 사랑한 성악가’가 된 연광철에게 바그너의 성지인 바이로이트 무대에 처음 선 기억을 물었다. “바이로이트에 가기 전에는 한 번도 관객으로 가본 적이 없어요. 다른 유명 극장도 제가 무대에 먼저 서 본 경우가 많았죠. 그곳은 당연히 긴장되는 무대였습니다. 저는 작은 역이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역할이었어요. 당시 유명 가수가 많았는데 공연 후 ‘저 가수(연광철 노래)를 좀 더 많이 듣고 싶다’는 평들이 있었고, 그래서 점점 더 큰 역을 맡게 됐죠.”
오페라 세계에서 바이로이트 극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역이다. 바그너가 직접 설계하고 완성한 이 극장은 천재가 창조한 음악극을 원형 그대로 구현하는 데 최적화됐다.
연광철은 “(워낙 바그너 애호가들이 모이기에) 관객의 80%쯤은 가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며 무대에 섰을 당시 압도적이던 분위기를 떠올렸다. 일반 극장이 자막으로 가사를 띄우는 것과 달리, 바이로이트에서는 자막이 없다. 텍스트와 음악을 완벽히 숙지한 이들이 객석을 채우기에, 무대에 오르는 가수에게 요구되는 완성도와 집중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국내에선 좀처럼 바그너 작품을 감상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바그너 오페라의 매력과 그 정수에 관해 물었다. “바그너의 작품을 보면 ‘총체예술’이라는 말에 가장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그너 본인이 직접 오페라 대본을 쓰고 작곡했기에, 그 속에서 절묘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와 성악 모두 아주 높은 완성도와 테크닉이 필요하고, 지휘자와 연출가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깊은 뜻을 다양한 색채로 펼쳐낼 수 있는 예술 작품입니다. 하지만 바그너는 가장 완성도 높은 오케스트라와 문학적으로 수준 높은 텍스트를 썼기 때문에, 이해도가 낮으면 지루하고 어려운 오페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연광철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파르지팔의 구르네만츠’이기도 하다. ‘파르지팔’은 총체예술로서 음악, 극, 시, 무대 등 모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 했던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다. 그의 예술과 철학이 총집결된 유언 같은 작품이다. 성스러운 창을 되찾아 성배 기사단을 위기에서 구하는 주인공 파르지팔을 인도하는 늙고 지혜로운 기사가 구르네만츠다. 그가 20여 분에 걸쳐 성배 기사단의 역사를 설명하는 독백이 이 작품의 백미. 특히 “시간은 여기서 공간이 된다(Zum Raum wird hier die Zeit)”는 명대사가 압권인데 연광철은 “작품의 철학적, 영적 중심을 잡는 숭고한 존재”라는 극찬을 받고 있다.
“구르네만츠 첫 출연은 2006년 제안이 와서 2년 준비 끝에 무대에 올랐죠. 독일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았지만, 당시에 연출이 굉장히 획기적이어서 회자됐습니다. 저로서는 함께하게 돼 매우 기뻤습니다. 구르네만츠는 본인이 드러나지 않는 인물인데, 노래 분량도 많고 스태미나와 기술 모두 요구됩니다. 그런데 특정한 인물 이미지로 묶이지 않는 장점이 있어, 저와 잘 맞는 배역이에요.”
당대 최고 연출가인 스테판 헤어하임이 독일 현대사와 바이로이트·바그너 가문 역사를 교차시킨 다층적 구성으로 2008년 파르지팔은 ‘기적적인 프로덕션’으로 평가받으며 2012년까지 바이로이트 무대에 올랐다. 연광철도 여러 차례 무대에 오르며 ‘현존 최고의 구르네만츠’가 됐다.
연광철은 올가을에도 미국 명문 샌프란시스코오페라단(SFO)이 새롭게 만드는 파르지팔 무대에 구르네만츠로 다시 선다. 지난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송년 공연에도 연광철을 불렀던 SFO는 “바그너 전문 베이스 연광철이 구르네만츠 역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 역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이 배역의 100번째 무대를 갖는다”고 홍보 중이다.
워낙 바그너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연광철은 베르디 전문이자 독일 가곡(리트)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2023년 한국 가곡만을 담은 앨범 ‘고향의 봄’을 발표했다. 이달에도 1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가곡 리사이틀 ‘디히터리트(시인의 노래)’를 열어 괴테와 박목월의 시를 중심으로, 슈베르트, 브람스, 볼프, 슈트라우스, 김동진, 김성태의 가곡을 선보인다.
연광철은 “가곡이 오페라보다 훨씬 어렵다”고 말했다. “오페라는 인물 하나로, 대본과 악보에 감정의 지점이 다 정해져 있죠. 그런데 가곡은 3분, 5분 안에 시 한 편의 세계를 다 그려야 해요. 시인이 그 시를 쓸 때의 상황, 사랑했을 때인지, 시련을 겪었을 때인지, 작곡가가 그 곡을 썼을 때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는지까지 알아야 합니다. 피아노 반주 하나로 모든 감정과 색채를 표현해야 하므로, 성악가의 다양한 색채와 테크닉이 훨씬 많이 필요하죠.”
그는 나이가 들수록 한국 가곡에 더 애정이 생긴다고 한다. “우리말로 노래할 때 관객과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어요. 젊었을 때의 열정과 나이 들어서의 성숙함을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가곡만큼 쉽게 다가오는 게 없습니다. 특히 한국 가곡은 우리 정서에 맞는 깊이를 줄 수 있어서 앞으로 더 많이 부르고 싶습니다.”
특히 이번 프로그램에는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곡들이 여럿 담겼다. 브람스의 ‘네 개의 엄숙한 노래’는 그가 꼭 한 번 한국 관객 앞에서 부르고 싶었던 작품이다.
“올해 제가 예순이 됐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가곡을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넣어서, 관객 앞에서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브람스나 볼프 같은 곡들은 제 커리어에서 이제 정리해 가야 할 레퍼토리이기도 합니다.”
세계적 성악가로서 오랫동안 만들어온 무대를 이야기하다 보니 함께 공연한 클래식 거장도 자주 등장했는데 특히 바렌보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묻어났다. 어떤 분이었는지 묻자 “음악적으로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바렌보임은 저랑 키가 비슷해요. 항상 ‘무대에서 턱을 들고 올려다보지 말고, 네 시선에서 바라봐라’고 했죠. 그러면 상대가 낮춰서 얘기합니다. 연극적이고 카리스마에 관한 이야기인데, 아주 정확하게 보고 제가 고쳐야 할 점들을 얘기해줬어요.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동양인인 저를 보호해주고, 중요한 무대에 세워주고, 한 가수의 커리어를 지켜봐 주고 제가 가야 할 길을 열어준 분이에요. 이번 독창회를 준비하면서도 바이로이트, 그리고 바렌보임과 함께한 작업에 대한 향수, 추억, 그리고 그에게 교육받은 것들이 묻어나요.”
연광철 성악가는…
●1965년 충북 충주 출생 ●1993년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 오페라 극장 솔리스트 ●1994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 우승 ●1994∼2004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솔리스트 ●199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데뷔 ●2018년 베를린 ‘카머쟁어’(궁정가수) 칭호 수여 ●2010∼2017년 서울대 성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