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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 “韓·美 관세 후속 협상, 시뮬레이션 통해 정교한 대응 전략을” [세계초대석]

입력 : 2025-08-12 18:50:49
수정 : 2025-08-12 21: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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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조건 얻어
FTA로 많은 혜택… 양국 윈윈 관계로
조선 등 전략 분야 협력 단계적 추진을

20년 만에 韓서 열린 PECC 총회 주목
새 통상 현실 반영·갈등 중재 대화의 장
‘여의도 선언’에 아·태國 공동전략 담겨

상법·노조법 개정안은 속도 조절 필요
법안 시행 시 외국인직접투자 등 영향
첨단·미래산업 중심 패키지 육성책을”

한·미 관세협상이 큰 고비를 넘었다. 일본·유럽연합(EU)과 동일한 상호관세율을 받아들면서 일단 한숨 돌리게 됐다. 안심은 이르다. 세부 조항을 매듭짓기까지 협상의 묘를 최대한 발휘해야 할 시점에, 한국의 대표적 민간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 정철 원장을 만나 후속 협상 전략과 한국 경제 현안에 대해 들었다. 11일 서울 영등포구 FKI타워에서 만난 정 원장은 “협상 과정에서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대응 전략을 정교하게 준비해야 한다”며 “중요한 것은 조선 등 전략 산업 분야에서 대미 협력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정 원장은 세계 곳곳의 지정학적 갈등과 보호무역주의가 거세진 상황에서 2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PECC·펙) 총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여당이 이달 국회 본회의 처리를 예정한 ‘더 센 상법’과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개정안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기업 투자 위축을 막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11일 서울 영등포구 FKI타워에서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경제단체가 기업을 대변해 정부에 입장을 전달하고 정부 얘기를 기업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며 “이제는 경제단체 역할이 전 세계 싱크탱크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정책 개발의 두뇌가 되거나 기업·정부가 하기 껄끄러운 부분에서 나서는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최상수 기자

―한·미 관세협상 결과에 대한 전반적 평가를 듣고 싶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주요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얻어냈다. 이번 협상은 과거 한·미 간 통상협상과 게임의 구조가 다르다. 과거에는 일대일로 했다. 지금은 미국이 여러 나라와 동시에 협상을 진행했다. 미국이 여러 나라를 경쟁시킬 수 있었고, 우리도 경쟁국보다 불리한 조건을 받아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 정부가 늦게 출범했음에도 짧은 기간에 불리하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만약 협상 기한을 넘겼으면 관세 25%를 맞은 상태에서 협상을 이어가야 했을 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무력화됐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금은 미국이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특별히 배려해주기 어려운 구도다. 2013년 한·미 FTA 발효 후 한국은 FTA로 충분히 많은 혜택을 봤다. 미국 시장에 유리한 조건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제도적인 부분을 선진화시키는 데도 도움을 받았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혜택을 받았다. 지금은 FTA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한편으로 한·미 FTA를 잘 활용해서 양국 간 윈윈 관계를 끌어낼 수 있다.”

―후속 협상에서 불거질 뇌관은 무엇이라 보는가.

“미국 실무진도 여러 나라와 협상해야 하니 머리가 아플 거다. 후속 협상 과정에서 양측 견해가 충돌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 당연한 과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스타일상 더 큰 이익을 위해 관세를 지렛대로 활용하거나, 대미 투자 방식 등 세부 사항에 대해 일방적인 요구를 할 수도 있다. 지금 단계에서는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대응 전략을 정교하게 준비해야 한다.”

―미국을 상대로 한국이 가진 레버리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핵심이다. 미국의 목적은 자국 제조업 부흥이고 결국 조선, 원전, 배터리 등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산업을 중심으로 한·미 협력이 중요한 카드가 될 것이다. 한국에 과도한 관세를 부과하면 결국 미국 제조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속해서 강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선 등 전략 산업 분야에서 협력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협력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단계별 속도를 조절하면서 미국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다. 산업 협력의 범위와 깊이·속도를 활용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전략이 필요하다.”

―각국이 무역 장벽을 높이는 가운데 12일 PECC 총회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협력이 논의됐다. PECC 총회는 어떤 취지로 열렸나.

“PECC은 쉽게 말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의 학계·민간 버전이다. PECC은 에이펙 출범을 이끌어 낸 조직으로 1980년 9월 창설됐다. 경제통상 학자들은 물론 경제계 인사, 전직 관료들이 독립된 개인의 자격으로 참여하는 민간 경제협력 포럼이다. PECC은 에이펙의 싱크탱크이자 유일한 민간 옵서버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총회는 20년 만에 한국에서 열렸다. PECC의 한국 위원회인 KOPEC(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의 공동의장 기관이 한국경제인협회와 대외정책연구원인데, 두 기관이 총회를 공동 주최했다.”

―이번 한국 총회의 의의라면.

“부산 에이펙 정상회의가 개최됐던 2005년 PECC 제16차 총회가 한국에서 열렸었다. 당시는 세계화와 자유무역주의가 확산하던 시기라 경제협력을 넘어 공동체를 이루는 방안 등 진취적인 주제에 관한 토론이 이뤄졌다. 20년 후인 지금 통상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글로벌 패권 경쟁이 심화하다 보니 자국 중심주의, 보호무역주의가 무역자유화를 압도하고 있다. 이런 갈등을 중재하고 같이 협력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PECC이다. 에이펙과 비교하면 PECC에서는 훨씬 자유롭게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제 역할을 거의 못하는 상황에서 미래를 논의하고 길잡이처럼 방향을 제시할 논의의 장이 있다는 건 가치가 크다. 이번 PECC 총회는 새로운 통상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아·태 지역에서의 지속 가능한 협력 추진을 위한 실질적 논의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총회에서 글로벌 경제 이슈를 넘어 △인공지능(AI) △저출산 △고령화를 의제로 올려 화제가 됐다.

“세 가지는 아·태 국가들이 직면한 공통 문제이자, 지속 가능한 성장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이슈다. AI 기술 발전의 혜택이 특정 국가·계층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방위로 확산돼야 한다는 것이 PECC의 생각이다. 에이펙 회원 간 공동 연구는 물론 인프라 투자 확대, 스타트업 육성 네트워크 조성, 관련 인력의 지역·국가 간 이동 증대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했다.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통합적 사회보장제도 개발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아이디어들도 나눴다.”

 

―총회를 계기로 13일 ‘여의도 선언’이 채택될 예정인데.

“논의 중인 ‘2025 여의도 선언문’에는 AI 활용 방향성 정립과 역량 강화, 포용적 성장을 위한 새로운 무역 패러다임 모색, 인구구조 변화 대응을 위한 공동전략이 담겼다. 이는 아·태 지역이 직면한 구조적 도전에 다자간 협력을 통해 함께 대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발현된 것이다. 개별 국가 차원을 넘어선 역내 협력이 중요해짐에 따라 에이펙의 정책적 플랫폼 역할이 한층 강화될 것이라 본다. PECC 역시 정책 아이디어 제공자로서 아·태 지역의 통합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선언을 통해 밝히려 한다.”

―상법·노동조합법 개정 추진에 경제계 우려가 크다.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노력한 만큼 성과를 낼 수 있던 자유무역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많은 나라가 보조금을 주며 자국 중심주의 상업 정책을 펴고 있다. 게다가 주요국은 AI 등 첨단기술에 어마어마한 재원을 쓰고 있다. 그러니 국내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투자를 늘리려면 한국 기업이든 외국 기업이든 투자하고 싶게 만드는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상법·노조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면 외국 기업이 투자를 꺼리게 만드는 시그널이 될 수 있다. 미국은 한국과 조선·방산 분야 협력을 원하는데, 법 개정으로 기업 활동이 제약될 수 있다. 경제 활성화 측면에서도 개정안 처리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주한유럽상공회의소 등도 개정안에 우려를 표했다. 법안이 시행되면 외국인직접투자(FDI) 등에도 타격이 있을까.

“외국 기업의 그린필드 투자(공장 등 설비투자)는 투자회수 기간이 길어 전력·교통 등 인프라와 노동비용은 물론 기업 관련 법·제도, 노사관계, 법인세제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그렇기에 법안 시행 시 FDI 등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

―중국의 무서운 기술 추격 속도에 한국 산업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은 이제 추격을 넘어 우리를 추월해 가고 있다. 격차 유지가 아닌 ‘기술 초격차 재확보’가 핵심 전략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도체 등 핵심 분야는 물론 AI·우주항공 등 신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개발(R&D) 투자와 정부 정책지원이 필요하다. ‘하던 대로’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전폭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통상 환경이 격변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돌파구가 절실한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국가안보와 전략 산업을 중심으로 한 선택적 협력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주요 수출시장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아짐과 동시에 핵심 전략 산업의 경쟁력이 협상 레버리지로서 더욱 중요해짐을 의미한다. 문제는 AI, 반도체 등 첨단 전략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주요국이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퍼붓는 이유다. 산업 보조금에 대해 규제를 해왔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양상이다. 우리도 첨단·미래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 생태계 전체를 지원하는 패키지 육성 정책이 나와야 한다. 안정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정철 원장은…

 

●미시간대 경제학 박사 ●미국 조지아공과대 경제학부 교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한국국제통상학회 부회장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 공동회장 ●한국경제인협회 연구총괄대표 겸 한국경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