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司法府)가 아니라 사법부(司法部)였다.”
1981년 4월 취임 2년1개월 만에 중도사퇴한 이영섭 7대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삼권 분립의 한 축이어야 할 사법부가 행정부의 일개 부처로 전락했다고 통탄했다.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친 이 대법원장은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한 달 반 만에 신군부에 의해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원고지 두 장에 불과한 짧은 퇴임사에서 “재임 기간은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었다”고 자조했고, 퇴임 후에는 “다시 태어난다면 법관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대법원장 자리를 거쳐 간 이는 1946년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부터 현 17대 조희대 대법원장까지 모두 15명이다. 이 중 2대 조용순, 7대 이영섭, 9대 김용철, 11대 김덕주 대법원장이 중도 사퇴를 했다. 임기를 채웠더라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재임 기간을 보낸 이가 많았다.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은 사법권 독립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충돌했다. 이 대통령은 1956년 정기국회 개회식 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서 유례 없는 권리 행사를 하고 있다. 경찰·검찰이 소상히 조사해서 재판소에 넘겨도 그냥 풀어 놓거나 범행과 상관없는 판결을 하기 일쑤니 일을 해나갈 수가 없다. 법관이 잘못해도 벌을 줄 사람이 없으니 마음대로 한다”며 사법부를 직격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튿날 “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해서 법을 운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정면 반박했다.

2대 조용순 대법원장은 5·16 쿠데타로, 9대 김용철 대법원장은 1988년 2차 사법파동으로 중도하차했다. 8대 유태흥 대법원장은 재임 중 이른바 ‘소신판사’에 대한 좌천성 인사 논란에 휘말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는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탄핵안이 국회에서 부결돼 임기를 채웠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중도 사퇴한 인물은 11대 김덕주 대법원장 한명뿐이다. 그는 1993년 김영삼정부 출범 직후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에 떠밀려 법복을 벗었다. 이후 취임한 윤관·최종영·이용훈·양승태·김명수 대법원장은 모두 임기를 마쳤다. 다만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대통령이나 정권 교체 시기에 대법원장은 항상 힘들었다”면서 “대법원장을 임명한 정권이 계속 유지되지 않으면 대법원장이 공격받는 사례가 많았다”고 말했다. 대법원장 임기는 6년으로 대통령(5년)이나 국회의원(4년)보다 길다. 1988년 이후 이일규 대법원장을 제외한 모든 대법원장이 임기 후반에 자신을 임명하지 않은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겪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대법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이용훈 대법원장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에 대한 무죄 판결을 문제 삼으며 이 대법원장 책임론을 꺼내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양승태 대법원장은 임기 말인 문재인정부 때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사퇴 압박을 받았다. 퇴임 후 구속까지 됐으나 이후 1심에서 전부 무죄를 받았고, 2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은 ‘거짓말 논란’ 등으로 사퇴 요구가 일었고, 윤석열정부 때 퇴임해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러나 정권 차원에서 현직 대법원장에게 사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