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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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담아 낸 거대한 생의 리듬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입력 : 2025-10-14 06:00:00
수정 : 2025-10-13 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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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항해사, 힐마 아프 클린트

칸딘스키 이전 최초 추상화가로 평가
여성·남성 의미 파랑·노랑 활용해 작품
두 색 합친 초록으로 순수한 통합 표현

인간의 생애 그린 ‘10점의 그림’ 대표작
‘높은 존재들’의 영적 메시지 전달 주력
선한 의지로 묵묵히 자신의 길 걸어가

스웨덴 출신의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는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칸딘스키 이전 최초의 추상 화가,’ ‘재평가받아야 할 여성 화가’로 불리며 미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 주요 미술기관이 줄지어 그를 조명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오는 26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이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을 개최해 작가의 예술 세계를 폭넓게 소개한다. 그의 예술에 우리는 왜 이토록 열광하는가? 100년의 시간을 지나 마주한 작품에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바다와 별 사이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 ‘10점의 대형 그림’ 연작, 1907,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부산현대미술관, 2025) 전시 전경.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힐마 아프 클린트는 스톡홀름 북부 솔나 시의 유서 깊은 해군 가문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에릭은 국왕에 대한 충성과 업적을 인정받아 귀족 작위를 받았고, 조부 구스타프는 19세의 나이에 탁월한 통찰과 용기로 군사 작전을 제시하며 수많은 스웨덴 군의 목숨을 살렸다. 용기와 사명감, 책임감은 어린 힐마에게도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훗날 그는 조부의 초상을 직접 그려 벽에 걸어두었다.

병영(兵營)에서 자란 그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 너머 미지의 세계를 상상했을 것이다. 항해도를 보고 배우며 수면 아래의 모습을 상상하고, 별자리와 달의 주기를 배우며 우주의 작용을 배웠을지 모른다. 비가시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시대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었다. 근대 과학은 빛과 파동, 원자의 구조를 발견하며 세상의 비밀을 밝히고 있었고, 영성을 탐구하는 심령 모임도 다수 존재했다.

1880년, 열 살이던 동생 헤르미나의 죽음과 그 전부터 경험한 환시는 아프 클린트에게 삶과 죽음, 비가시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깊게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1891년, 동료 여성 화가의 작업실에서 처음으로 영매 체험을 하며 ‘침착하게 너의 길을 가라’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아프 클린트는 이후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받으며 회화를 통해 그 의미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 ‘No. 1, 백조’, 그룹 IX 파트 I, SUW 연작, 1914∼1915, 캔버스에 유채, 150×150㎝.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제공

◆형상의 서막

스톡홀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진학한 아프 클린트는 뛰어난 재능으로 두각을 보였지만, 자신의 임무는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다. 이에 1896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성 5인으로 구성된 강령회 ‘5인회’를 결성하여, ‘영적 안내자’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글과 자동기법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함께 묵상했다.

연필로 영적 체험을 빠르게 기록하던 아프 클린트는 1906년, 처음으로 색을 더해 ‘태초의 혼돈’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완성작에서는 회색과 푸른색을 사용하여 폭풍 속 태아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그렸다.

이후 다양한 형상들과 함께 파랑과 노랑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상징체계에서 각각 여성성과 남성성을 뜻하는 두 색은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겨졌던 금빛과 울트라마린색을 떠올린다. 파랑은 성모 마리아의 색으로 순수와 고귀함을, 금색은 신성과 영적 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천상의 색이다. 초록은 두 색이 합쳐진 색으로 아프 클린트의 그림에서는 남녀 구분을 넘어선 순수한 통합의 상태를 표현한다. 이와 더불어 생명의 순환을 암시하는 유기적 요소들은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과 같은 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도상을 연상시킨다. 아프 클린트의 작품은 미술사적 유산을 품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추상 언어를 창조해내려 시도한 흔적을 보여준다.

◆생의 회전목마

대표작으로 꼽히는 ‘10점의 대형 그림’은 세로 3m가 넘는 초대형 연작으로, 인간의 생애를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는 여정으로 그린다. 원, 나선, 꽃잎 같은 모티프들은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며 돌고 도는 거대한 생의 리듬을 표현한다.

첫 번째 그림에서 백합과 장미는 수정(受精)의 순간을 포착한 듯한 원형 구조 위를 맴돌며, 탄생의 기쁨을 알린다. 두 꽃은 파랑과 노랑처럼 각각 여성성과 남성성을 상징한다. 좌-우 쌍으로 이루어진 구조는 세상을 구성하는 이원적 개념들을 상기하며 이들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시각화한다.

청년기와 성년기로 전개되면서 화면은 점점 더 복합적으로 전개된다. 질서와 혼돈,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장면은 반세기 뒤 발표된 로렌츠 방정식의 나비 모양 도식을 예견하는 듯하다. 문자의 사용도 두드러진다. 도식화된 글자들은 조형의 일부가 되어 글과 그림의 경계를 허물고, 지성과 본능, 언어와 직관이 하나로 섞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노년기에 이르면 색은 점차 희미해지고, 대칭과 질서가 두드러진다. 마지막 그림에서는 정사각형들 사이 빈 공간에서 십자가가 떠오르며 영적 항해의 종착점을 암시한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나선은 이 모든 여정을 관장하는 초월적 힘으로 해석된다. 화면 양 끝의 검은 점들은 필연적 쇠퇴와 소멸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내 나선의 궤도를 따라 거대한 힘 속에 녹아들며 또 다른 차원을 향해 나아간다.

◆선한 것을 향하여

아프 클린트가 자신을 ‘높은 존재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매로 여겼다는 점 때문에 그의 그림을 예술로 볼 수 있는지 논의가 이어져 왔다. 특히 그가 활동하던 시기, 영성을 주제로 한 비구상 회화는 종종 정신 이상으로 치부되었고 그 역시 작품을 전시했지만 공감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영적 내용을 담은 작품 제목에 ‘+’와 ‘x’를 표시하고 사후 20년이 지나기 전까지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프 클린트는 고립된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위대한 작품을 연구했고, 국제 정세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현실과 영적 세계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성은 허상이 아닌 실재였고, ‘높은 존재’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소명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개인의 영역이나 종교적 경계 너머, 세상에 조화를 되찾게 해줄 생의 근원을 발견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예술이 무속이나 종교와 구별되는 이유다.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용기, 미래에 대한 믿음과 확신 속에서 그는 더 큰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색과 도형, 기호가 진동하는 화면 속에서 미미하게나마 그가 보았을 것을 짐작해 본다. 나선을 타고 도약하고자 했을 또 다른 차원을 상상한다. 점으로, 소용돌이로, 빛의 입자로. 아프 클린트가 미래를 위해 남겨둔 그림들은 시간을 통과해 우리 앞에 새로운 계시로 다가온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